출판사 서평
* 로버트 F. 케네디는 누구인가?
법무부 장관, 상원의원을 역임하고 대선에 출마한 미국 리버럴 진영의 아이콘 정치인. RFK 혹은 ‘바비’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케네디가 9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나 존 F. 케네디와는 여덟 살 터울인 동생이다. 하버드대학과 버지니아대학 로스쿨을 졸업한 뒤 1952년 존 F. 케네디가 상원의원 선거에 뛰어들자 선거운동 사무장을 맡아서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때 보여준 근면성과 실행력으로 형의 절대적인 신임과 함께 “무자비ruthless”하다는 악명을 얻었다. 1961년 형 케네디가 대통령이 되자 35세에 법무부 장관 자리에 올랐다. 취임 후 흑인 민권 개선, 조직범죄 소탕에 주력했고 “워싱턴의 2인자”라고 불리며 쿠바 미사일 위기 같은 외교·안보 문제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케네디 대통령 암살 뒤에는 장관 자리에서 물러나 1964년 뉴욕주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했고 현직인 공화당 의원을 누르고 의원 배지를 달았다.
1968년 3월 16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자 존슨 정부의 정책에 염증을 느끼던 지식인과 젊은이뿐 아니라 흑인과 멕시코계 같은 소수인종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선거 기간에 로버트 케네디는 미국 사회에서 현실에 안주하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며 인종 간,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 간, 세대 간 격차를 좁히려고 노력했다. 특히 4월 4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된 직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연설문 없이 진행한 추모 연설은 미국 정치사에서 가장 감동적인 연설로 손꼽히며 연설 현장인 인디애나폴리스는 킹 목사 사후에 벌어진 전국적인 흑인 폭동 사태를 비껴간 도시로 남은 것으로 유명하다. 이 에피소드는 〈희망의 잔물결Rippe of Hope〉라는 제목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로 제작되었다.
킹 목사 암살 두 달 뒤인 6월 5일 로버트 케네디는 캘리포니아주 LA에서 예비선거 승리 연설을 한 후 시르한 시르한이라는 요르단계 이민자에게 총격을 받아 4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며 변화를 기대한 수많은 미국인의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6월 8일 로버트 케네디의 시신을 실은 장례 열차가 뉴욕에서 출발해서 묘지가 있는 워싱턴으로 이동할 때 200만 명에 달하는 미국인이 철길에 몰려와 360킬로미터에 달하는 슬픔과 절망의 인간사슬을 만들었다. 로버트 케네디 사망 50주기에 해당하는 2018년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는 로버트 케네디의 생애와 유산을 다룬 4부작 시리즈 〈로버트 우리가 사랑한 케네디〉를 공개했다.
* 아마존닷컴 ‘이 달의 책’ 선정 저자 인터뷰 주요 내용
Q: 바비 케네디가 대선 후보였던 기간은 100일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런 사람의 이름에 오늘날까지 이야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 물론 국민의 사랑을 많이 받았고 결국은 순교한 대통령의 동생이었다는 사실과, 자신도 암살당한 사실이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로버트 케네디가 지금의 미국과도 관련이 있는 인종, 빈곤, 무분별하고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전쟁과 같은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로버트 케네디는 이런 문제를 다루기만 한 것이 아니라 1968년 이후에 선출된 대통령이나 다른 정치인과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솔직하고 열정적으로 다뤘다.
Q: 케네디는 암살 우려에도 불구하고 위험하게도 자신을 군중에게 노출시켰다. 그런 행동은 반항에서 비롯된 것일까? 아니면 확신에 찬 행동이었을까?
- 반항이자 신념이었다. 케네디는 존슨 대통령의 방탄 리무진에 대해 기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한 가지 말씀드리죠. 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 그런 빌어먹을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못 볼 겁니다. 대통령이 국민과 함께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그런 나라가 되게 할 수 없어요.”
선거운동 내내 후보의 안전을 걱정했던 보좌관들이 케네디에게 TV 스튜디오 선거운동에 주력하고 현장 유세를 줄이라고 촉구했을 때, 로버트 케네디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지지자들이 나를 볼 수 있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프레드 더튼 보좌관에 따르면 케네디는 군중이 “몇 잔의 술”처럼 자신에게 활기를 불어넣어 준다는 사실과, 자신을 사람들에게 노출시키는 것이 “무자비”하다는 자신에 대한 악명이 부당하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릴 최선책이라는 것을 알았다.
Q: ‘만약에”라고 시작하는 질문이 바비 케네디와 그가 남긴 유산을 아련하게 둘러싸고 있다. 책을 쓰면서 어떤 한 가지 질문이 머리에 맴돌았는가?
- 몇 가지 “만약에”로 시작되는 질문이 계속 떠올랐다. … 만약 로버트 케네디가 공천을 받아 대통령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해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폭동이 일어났을지 의심스럽다. 이 폭동은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도움을 주었고, 그 후 40년간 민주당의 골칫덩어리가 되었다. 대통령이 된 로버트 케네디는 얼마 안 가 베트남에서 미군을 철수시켰을 것이고 베트남 전사자 명단도 훨씬 줄었을 것이다. 미군의 캄보디아 폭격과 켄트주립대 총격사건, 워터게이트 등도 없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