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밝힐수록 짙어지는
우주라는 수수께끼
아인슈타인은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우주가 균질하고 등방하다는 대담한 가정을 세웠다. 하지만 그것은 증거가 아니라 신념에 가까웠다. 이에 프리드먼은 우주가 팽창하거나 수축한다고 제안했고, 르메트르도 혼자 팽창하는 우주 모형을 발견했다. 허블은 은하들이 서로 멀어지고 있다는 관측을 통해 적색이동과 거리의 관계에 대해 발표하면서 팽창하는 우주라는 그림에 힘을 실었다. 그렇다면 우주는 정말로 팽창하는 것일까, 아니면 처음부터 지금과 가은 모습이었을까? 이후 수십 년간, 정적인 우주 모형과 빅뱅 우주 모형이 분분히 경쟁했다. 가모프는 뜨거운 초기 우주에서 헬륨이 만들어졌다는 파격적인 아이디어를 내놓았으나, 그의 이론은 오랫동안 학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묻혀 있었다. 그러다 1960년대 펜지어스와 윌슨이 우연히 원인을 알 수 없는 잡음을 포착했다. 그 잡음은 훗날 우주 배경 복사로 밝혀졌고, 이 발견을 통해 빅뱅 우주론은 마침내 설득력 있는 표준 이론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편 천문학자들은 은하 주변에서 보이는 질량보다 훨씬 큰 중력의 흔적을 발견했다. 이 잃어버린 질량은 여러 이름으로 불리며 논쟁을 낳았다. 입자물리학자들은 이 정체불명의 질량이 중성미자일 수도 있다는 가설을 제기했으나, 곧 차가운 암흑 물질이라는 새로운 후보가 등장하며 논의의 중심이 되었다. 1980년대에는 우주론적 급팽창이라는 또 하나의 아이디어가 등장했고, 이후 20여 년간 수많은 변형이 제안되고 검증받아 왔다.
1998년, 초신성 관측을 통해 우리는 우주가 가속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우주 배경 복사에 대한 정밀 측정이 놀라운 결과를 일치를 보여 주었다. 서로 다른 두 방법이 같은 결론에 도달하며 우주론은 혁명적인 시기를 맞이했다. 이 혁명을 통해 오늘날 표준 모형으로 불리는 ΛCDM 우주론이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 표준 모형을 이루는 것, 우주를 이루는 암흑 물질과 암흑에너지의 정체는 여전히 밝혀지지 않았다. 100년 전 아인슈타인이 던진 질문은 여전히 다음 세대를 향해 열려 있다.
모든 과학의 출발점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지름길
우주에서 우리는 티끌보다도 작은 존재다. 그런데 그 작은 존재가 우주 전체의 모양과 역사를 그려내고자 한다. 손닿을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은 대단하다. 밤하늘을 올려다볼 때 우리가 보는 별빛은 이미 사라진 과거에서 온 것이다. 우주론은 그 빛을 거슬러 읽으며 시간의 흔적을 되살리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가능하려면 지금 여기에서 가능한 물리법칙이 저 먼 은하에서도 똑같이 작동해야 한다. 그래서 우주론을 검증한다는 것은 곧 물리학의 보편성 자체를 시험하는 일이 된다.
또한 우주론은 인간이 ‘내가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훈련장이기도 하다. 이 학문의 곳곳에는 오래 믿어 온 모형이 하나의 관측으로 뒤집히는 순간들이 있다. 여러 실패가 쌓여 지금의 우주론이 되었다. 이 과정에서 얻은 위성 측정 기술과 신호 처리 방법은 뜻밖에도 우리 일상에서 쓰이는 기술이 되기도 했다. 이처럼 우주론은 다른 모든 자연과학이 딛고 서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우주론을 이해한다는 것은 다른 과학들이 서 있는 무대를 이해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가 가진 우주의 그림은 완성된 초상이 아니라, 계속 덧그릴 밑그림에 가깝다. 이 그림에 다음 선을 그을 사람이 누구든, 새 선을 긋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발걸음을 알아야만 한다. 우주론이 중요한 이유는 결국 여기에 있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해 온 방식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과 황호성 교수의
섬세한 번역과 해제로 만나는 우주론
카이스트와 서울대학교를 거쳐 하버드-스미스소니언 천체물리연구소에서 연구하고, 피블스와 직접 학문적인 인연을 맺었던 황호성 교수가 이 책의 번역을 맡았다. 같은 학문의 언어로 사고해 온 사람의 시각으로 원작의 전문성과 현장감을 완전히 담아냈다. 또한 번역에 그치지 않고 별도의 해제를 더해, 국내 독자들이 이 책이 다루는 100년의 흐름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도록 길잡이 역할을 자처했다. 노벨상 수상자가 쓴 원문이 그 학문적 계보를 잇는 번역자의 손을 거쳐 국내 독자에게 전해진다는 것, 이것이 이 책을 신뢰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이유다.
책 속에서
-우주론을 더 잘 설명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한참 거슬러 올라가서, 흥미롭게 보였지만 잘못된 것으로 판명되었거나, 결국 흥미로운 것이 아니라고 여겨진 것들도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우주론이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부분들이 잘 융합되어야 했다. 그러나 각 부분이 서로 다른 방법과 이유 때문에 각기 다른 속도로 진행되어 왔기 때문에, 우주론 발전을 시간 순서대로 설명하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에서는 우주론 확립에 필요했던, 그러나 다소 개별적으로 진행된 여섯 가지 연구에 대해서 설명할 예정이다. _30쪽
-본디(1952, 14, 15)는 자신의 책에서 다른 형태의 통계적 균질성을 언급했는데, 이는 훗날 프랙털 은하 분포라고 알려진 ‘계층적 군집(clustering hierarchy)’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예를 들어 은하를 입자처럼 간주했을 때, 이것이 어떤 규모의 집단을 이루고, 다시 이 집단보다 더 큰 집단을 이루고, 이러한 구조가 점점 더 큰 규모로 확장해 갈 수 있을 것이다. _84쪽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우주론에서는 공간적으로 균질한 우주를 바탕으로 하는 2개의 모형이 대부분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하나는 시간에 따라 변하는 우주 모형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에 따라 변하지 않는 정적인 우주 모형이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우주는 종종 빅뱅 우주 모형이라고 불리는데, 매우 밀도가 높은 초기 상태에서 시작한 팽창을 일반 상대성 이론으로 기술한다(빅뱅이라는 단어가 적절하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고, 결국 이 책에서도 쓰이게 된 이유를 40쪽에서 이미 설명했다). _93쪽
-우주 공간은 거의 균질한 복사, 즉 보통 CMB로 불리는 우주 마이크로파 배경 복사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밀리미터에서 수십 센티미터까지 넓은 파장에서 감지된다. 그 스펙트럼의 강도, 즉 파장에 따른 에너지는 열평형(thermal equilibrium)에 도달한 복사가 갖는 스펙트럼과 거의 완벽하게 일치한다. 오늘날의 우주는 우주 배경 복사 파장에 대해 투명한데, 이는 우주가 복사 에너지를 억지로 낮춰서 이 독특한 열 상태(thermal condition)에 이르게 했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 열 스펙트럼(thermal spectrum)은 이 복사가 지금의 우주와는 상당히 다른, 거의 열평형에 이를 정도로 밀도가 높고, 뜨거웠던 때의 잔재(remnant)라는 점을 매우 강력하게 뒷받침하는 증거가 된다. _229쪽
-직관은 소중하지만, 여기에는 직관이 분석을 부당하게 압도한 한 가지 사례가 있다. 이것은 우주론의 역사에서 후대의 연구자들에 비해 훨씬 적은 자료와 훨씬 빈약한 분석의 전통 속에서 연구해야 했던 선구자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하나의 교훈으로, 어쩌면 하나의 희망으로 제시하는 것이다. 즉, 오늘날 우리가 받아들이는 우주에 대한 표준적인 이해의 일부에 대해서도 여전히 우리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이다. _434쪽
-1977년 5월 예일대학교에서 열린 은하의 진화와 별의 종족에 관한 학회에서 아이번 킹은 “우리가 우주 물질 90퍼센트의 성질이나 심지어 정체를 모른다면, 정말 우주의 본질에 대해서 무엇이든 안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라고 이야기했다(킹, 1977, 9). _502쪽
-실험실에서의 비중입자 물질 검출과 비중입자 물질이 천체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내는 기술의 큰 진보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될 만한 영웅적인 작업이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비중입자 암흑 물질 검출 또는 암흑 영역(dark sector)의 더 흥미로운 물리학의 가능성을 보여 주는 현상에 대한 꿈은 아직 짝사랑에 불과하다. 이것이 비중입자 암흑 물질 가설을 반박한다거나, 물론 윌킨스 미코버Wilkins Micawber의 철학-아마도 뭔가 나타날 거야(Perhaps something will turn up)-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_542쪽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세기 전환에 이르는 약 20년 동안 실현 가능한 우주론을 찾기 위해 검토된 아이디어 대부분이 원래의 sCDM 모형에서 최소한으로 벗어난 것들이었으며, 급팽창에 관한 초기 아이디어에서도 최소한의 변형만을 가한 것이었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줄 수 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올바른 방향을 놓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다음 장에서 요약할 증거를 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_581~582쪽
-만약 이처럼 논리적으로 완성된 새로운 이론이 시험 가능한 예측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것이 과연 빅뱅 이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가벼운 원소들이 형성되던 시기부터 어린 은하들이 보이는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아주 오래 전 먼 곳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가 거의 확실히 알고 있다고 주장한다. 나는 새로운 예측에 대한 검증 없이는 빅뱅 전에 일어났던 일에 대해 논리적으로 완전한 이론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_614~615쪽
-우리 자신을 속이려는 의지는 확실히 인간 본성의 기본 요소이며, 어쩌면 때로는 유용할 수도 있다. 아마도 좀 더 많은 연구자들이 활동하는 자연과학의 분야에서는 이런 영향의 예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우주론의 역사에서 그런 잘못된 방향의 궁극적인 감지와 수정의 예시 또한 볼 수 있다. _63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