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서왕가〉의 원 제목은 〈나옹화샹셔왕가〉로, 1704년 예천 용문사에서 처음 판각되고 1741년 팔공산 수도사에서 재간된 목판본 『대미타참략초요람보권염불문大彌陀懺略抄要覽普勸念佛文』에 실려 있다. 순한글 줄글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작품이 애초 지어진 해를 1370년으로 볼 때, 오랜 기간 구송되어 오다가 문자로 정착된 만큼, 원전 모습 그대로를 지니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같은 구전 텍스트의 기록 텍스트화 과정에 얼마만큼의 변형이 있었는지에 대한 사실 또한 지금으로서는 추단하기 어렵다.
〈서왕가〉는 적잖은 이본이 전한다. 판각본만을 들어도 위의 용문사ㆍ수도사 판각본 외에도, 대구 동화사(1764), 구월산 흥률사(1765), 묘향산 용문사(1765), 합천 해인사(1776), 무장 선운사(1787)에서 거듭 판각되었다. 본문은 순한글 또는 국한문 혼용체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본 간 내용 상의 차이는 거의 없다. 판각이 이루어진 지역을 보면 영남, 호남, 경기, 황해 등 전국적인 분포 양상을 보이고 있고, 판각 연대를 보면 1704년부터 1787년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이처럼 〈서왕가〉가 광범위하게 판각ㆍ유통된 것은 작품이 수록된 『보권염불문』을 통한 대중 포교와 임병 양란 이후 교세가 쇠약해진 불교계가 불교의식 정비라는 시대적 소임을 수행하는 데 상징적이고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서왕가〉는 판각본을 저본으로 필사된 몇 종의 이본이 전하는데, 대부분 20세기 초에 필사된 것으로서, 내용 역시 판각본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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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대 유가 사대부의 이상은 독서를 통해 인문 교양과 출사出仕 능력을 갖춘 다음,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제수받고 임금을 보필하며 나라 경영에 참여하는 일이다. 이 같은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이상이야말로 유가 사대부로서의 자아를 실현하는 길이다. 덕치德治와 민본民本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의 구현은 사대부적 자아 실현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데 사대부의 벼슬살이는 대부분 순탄치가 않다. 시대마다 정치적 알력이 있게 마련이고, 중심 세력의 판도에 따라 자리 보전이 쉽지 않은 까닭이다. 특히 조선조 15세기 말에 시작된 사화로부터 18세기까지 전개된 당쟁의 시기에는 정론政論과 입지立地가 다른 데서 말미암은 사대부 간의 정치적 알력이 매우 심했다. 그래서 사대부 사회에서는 관인으로서의 삶을 살다가도 하루아침에 낙향하여 전원에 묻혀 지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낙향의 이유는 개인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당대 정치 현실과의 갈등에 말미암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렇듯 출사와 낙향은 사대부 공통의 문제이자 관심사였으며, 저마다의 인생 행로를 판가름하는 관건으로 작용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1536~1593)처럼 경국제민의 이상 실현에 매우 적극적이었던 사대부가 있는가 하면,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1489~1546)처럼 아예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사대부가 있기도 했고, 퇴계 이황退溪 李滉,(1501~1570)처럼 관직에 나아갔다가 벼슬살이를 계속하다가는 큰 풍파를 만나겠구나 싶어 자청해 낙향한 사대부가 있기도 했다. 일찍이 율곡 이이栗谷 李珥(1536~1584)는 그의 ?동호문답東湖問答?에서 “선비가 벼슬길에 나아가 경국제민의 뜻을 실천하는 것은 진실로 원하는 바이거늘, 물러나 스스로 분수를 지키는 것이 어찌 그 본심이겠는가. 때의 만남과 못 만남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했다. 이 같은 율곡의 ‘때의 만남과 못 만남이 있을 따름’이라는 말이야말로 사대부 사회의 출사와 낙향 문제의 모범 답안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 p.51~52
송순宋純(1493∼1583)의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또는 성지誠之, 호는 면앙정?仰亭 외에 기촌企村이 있다. 추성군 봉산면 상덕리 기촌(지금의 담양군 봉산면)에서 아버지 이조판서 송태宋泰와 어머니 순창 조씨淳昌 趙氏 사이에서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면앙정의 집안은 대대로 충청도 신평ㆍ홍주ㆍ연산 등지에서 살았는데, 고려 말기에 집안이 조선 건국에 협조하지 않았던 연유로 고조대에 정치적 핍박을 피해 전라도 추성秋成(오늘날 담양)으로 옮겨 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담양군 봉산 마을은 신평 송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던 면앙정은 집안 어른인 지지당 송흠知止堂 宋欽(1459∼1547)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지지당은 16세기 초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문신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청백리로서 학문과 인품이 뛰어났는데, 그의 가르침은 훗날 면앙정의 인품과 학자적 풍모를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면앙정은 21살(1513) 때 눌재 박상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한다. 눌재는 호남 사림의 태두격으로서, 정암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여 기묘명현己卯名賢으로 일컬어지는 한 사람이다. 눌재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면앙정은 인생관과 철학을 정립시켰다고 한다. 면앙정은 또한 24살(1516) 때 취은 송세림에게 나아가 수학했는데, 취은이 당시 능성(오늘날 능주) 현감으로 와 있었을 때다. 취은은 패관문학으로 유명한 『어면순禦眠楯』의 작자다. 면앙정은 취은에게서 학문적 자질과 문학적 소양을 닦았다고 한다.
--- p.90
인생에서 가장 확실한 한 가지는, 우리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가장 불확실한 한 가지는, 그 시기가 언제인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삶은 이렇듯 가장 확실한 한 가지와 가장 불확실한 한 가지 사이를 흐르는 강물에 잠시 발을 담그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듯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그래서 아주 오랜 옛날로부터 무한하고 영원한 무언가를 상상하고 동경해 왔다. 그 상상과 동경의 대상은 시대와 지역 및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신, 신선, 무릉도원, 아틀란티스, 유토피아 등의 관념이자 존재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시간과 공간의 한계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숙명을 인식한 인간의 무한성과 영원성에 대한 희구와 열망의 상상적 산물인 셈이다.
조선 사대부의 상상과 동경 속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존재는 신선과 무릉도원이다. 그래서 그들 문학 작품에 형상된 신선, 무릉도원을 두고 흔히 도가적道家的 성향이라 일컫는 것이 통례다. 나아가 이러한 성향을 현실 초월의 경지로 이해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추구하는 노장老莊의 도道까지가 포함된다. 그러나 과연 조선 사대부들의 문학 작품에 등장하는 신선이나 무릉도원이 도가적 성향으로 통칭되는 현실 초월의 경지이며 도가 사상이 투영된 국면이기만 한 것일까?
조선시기 사대부가 되는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유학적 교양, 관직, 도덕적 품성이 그것이다. 그렇기에 조선 사대부는 독서를 통해 유학적 교양을 쌓고,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을 제수받아, 오랜 기간 닦아온 도덕적 품성을 발현함으로써, 나라 경영에 참여하여 백성을 구제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경국제민經國濟民의 이상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경국제민은 엄격한 생활 윤리와 함께 철저한 현실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차별 세계의 삶을 긍정하고 실천궁행의 논리에 입각해 있다. 이는 사대부의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과업이자 관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사대부의 문학 작품, 특히 시가에 빈번히 등장하는 신선, 무릉도원의 관념이자 존재는 무엇일까? 이는 요컨대 시적 소재의 차원에서 도입된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소재적 차원의 사상事象을 곧바로 이념 혹은 사상적 국면의 투영으로 이해하는 것은 위험하다. 신선, 무릉도원과 같은 관념이자 존재 자체를 이념 혹은 사상으로 수용하는 것은 곧 사대부의 자기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142~143
두곡 고응척은 문학인보다는 도학자로서의 행적이 두드러진 인물이다. 그가 적지 않은 작품을 남긴 문학인이면서도 그의 대다수 작품들의 성향이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교훈적 내용을 노래한 도덕가류라는 점으로 인해 문학사에서도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근대 이전 시기 문학의 작품론적 성향에 대한 우리의 시각은 요컨대 인식을 상대화시킬 필요가 있다. 문학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인식은 물론 작품 성격에 있어서도, 오늘날 우리가 순문예적 성격에 국한하는 것과는 달리, 당대에는 설명적ㆍ교술적 내용을 지닌 경우들까지도 사유와 정서의 등가물인 한 문학 작품으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심미적 감성을 바탕으로 예술적 형상화를 이룬 경우만을 가치 있는 문학 작품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두곡은 16세기 당대 여느 사대부에 견주어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작품을 남겼다. 더욱이 161수의 한시만이 아닌 58편의 부, 그리고 우리말 시가인 시조 28수와 가사 1편에 이르기까지 장르 면에서도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물론 그의 작품론적 성향은 가사 〈도산가〉를 예외로 할 때 예의 성리학적 이념에 바탕을 둔 교훈적 내용을 노래한 도덕가류가 대다수를 차지한다. 특히 그가 남긴 시조 28수 가운데 25수는 『대학』의 뜻을 풀어내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신이 탐독한 경서 내용을 대중적으로 공유하고 교화의 방편으로 삼고자 한 의도의 소산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성향을 지닌 작품들의 경우 심미적 감성을 바탕으로 한 문예미보다는, 이성적 논리로부터 비롯되는 이념적 경직성과 교술성이 두드러진다.
--- p.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