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온몸으로 받아내는 삶, 물러설 수 없는 사랑
그런데 ‘보통의 아이들’과 다른 아이는 도대체 어떤 아이란 말인가? 이 아이는 사회가 ‘장애인’으로 부르는 아이다. 이 아이는 때로 순간적인 분노에 휩싸여 엄마를 때리기도 하고, 배움과 치유를 거부하기도 하는 아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아이는 아니다. 엄마를 업어주려는 아이이고,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을 도화지에 쓸 줄 아는 아이이고, 식물과 곤충을 채집할 줄 아는 아이이고, 포켓몬을 상상할 줄 아는 아이이고, 물고기 잡는 족대를 동네 형에게 빌려줄 줄 아는 아이이고, “엄마/ 나를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마워요”(「태어나 줘서 고맙다」)라고 말할 줄 아이이다. 우리는 이 아이를 무어라 부를 수 있을까? 이 아이는 아픈 아이가 분명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을 아는 아이임도 분명하다. 혹 오랜 생명의 역사를 통해 내려온 인간이라는 종의 내면 중 어두운 부분을 충동적으로 표출하는 아이는 아닐까? 하지만 어쨌든 엄마에게 깊은 상처를 주며, 동시에 자신도 상처를 받는 아이임이 분명할 것이다. 다음 시를 보자.
엄마가 미안해
엄마가 살아 있어서 미안해
아이는 말뜻을 알아듣고는
그런 말 하지 마
그건 나쁜 말이잖아
그런 말 하면 너무 슬퍼
_「그런 말 하지 마」 부분
엄마와 아이는 이런 뜨거운 교감과 사랑의 감정을 나누지만 현실에서 둘의 상처는 깊어질 대로 깊어진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상처도 사랑의 감정이 있어야 생기는 법 아닐까. 저자는 아이에게 받은 고통과 상처 때문에 죽음까지도 생각하지만 결국 사랑의 힘으로 삶의 자리에 복귀한다. 표제작인 「나는 살아야겠다」는 그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동이 트고 잠이 깨면
아침마다 두려움에 떨었다
밤마다 아이를 먼저 재우고
나도 눕고 나면
오늘이 지상에서의 마지막 밤이기를
기도했다
나에게 내일은 없기를 바란
그런 날들이 있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살고 싶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었고
살고 싶었다
아니, 나는 살아야겠다
_「나는 살아야겠다말」 부분
이런 말은 사실 화자의 지독한 코나투스(conatus)라기보다는 추천사를 쓴 김성남 소통과지원연구소장의 말처럼 ‘온몸으로 받아내는 삶, 물러설 수 없는 사랑’이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이 작품에서, 쉬운 말로 악착같이 살겠다는 의지가 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시집 전체에서 느껴지는 생명과 사랑의 기운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만의 작은 정원을 꾸민 지/ 얼마 안 되었으니/ 비와 바람과 태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날 우리 정원을 가꾸며/ 더 오래 참고 기다려보자/ 날이 지나고/ 어느 날엔가는 정말 우리 집 작은 정원이/ 곤충 호텔이 될지도 몰라/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보자/ 사랑은 오래 참고/ 오래 견디는 것이고/ 기다림이니”(「곤충 호텔」).
이만하면 내미는 대화의 손길을 잡아줄 만하지 않을까?
시인의 말
살기 위해서 매일 걷고, 읽고, 썼습니다. 글쓰기는 내 삶의 이야기를 새롭게 써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내 삶에 새로운 의미와 해석, 가치를 부여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아픔이 시가 되었고 정직한 절망이 시를 낳았습니다. 제 아픔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저의 삶이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울고자 시를 썼습니다. 함께 웃고자 시를 썼습니다. 독자 여러분과 만나고 대화하고 싶어 시를 썼습니다.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세상을 감각하고 인식하는 자녀를 키우며, 아이의 마음을 알고 싶어, 아이의 영혼에 진정으로 가닿고 싶어 숱하게 절망하고 눈물 흘리고 후회하고 자책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일어나 아이의 손을 잡고 새로운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아이가 내 삶에 찾아오지 않았다면 이 시집도 탄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이가 함께 제 삶의 시를 써주었습니다. 저도 아이 삶의 시 쓰기에 동참했습니다.
시(詩)의 집을 한 채 지어 세상에 내놓기까지 내 삶이 끝내 꺾이거나 무너지지 않고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내 안의 빛을 비추어 준 사랑하는 나의 아들,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께 이 책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