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이 질문들을 따라가면서 발현, 현전, 균열, 잔여, 변용이라는 다섯 개의 말을 붙이게 되었다. 처음에는 창작 과정의 단계처럼 보였지만, 차츰 이것들이 순서를 설명하기보다 세계를 대하는 다섯 가지 태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발현은 세계가 오는 것을 허락하는 태도이고, 현전은 그것과 함께 있는 태도다. 균열은 익숙한 의미가 흔들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이고, 잔여는 마지막 의미를 독점하지 않는 태도다. 변용은 그 모든 만남이 독자 안에서 다시 살아나도록 놓아주는 태도다.
이 책은 완성된 체계를 선언하기 위한 책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쓰고 있는 시들을 되돌아보며 그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움직임을 하나씩 확인하는 과정이다. “기울다”, “말하지 않는다”, “곁”, “그늘”, “남아 있다”, “건네진다” 같은 말들이 왜 자꾸 내 시 속에 돌아오는지 들여다보다 보니, 그것들은 취향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 방식이었다. 존재는 무엇인가를 향해 기울지만 완전히 소유하지 않고, 말하지 않지만 사라지지 않으며, 떠난 뒤에도 어떤 흔적을 남긴다.
따라서 이 책은 창작론이면서 동시에 자문서다. 앞으로 내가 시를 쓸 때마다 다시 묻게 될 질문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내가 너무 많이 말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물이 내 생각의 도구가 되고 있지는 않은가. 이미지와 철학 사이의 긴장을 너무 빨리 해소하고 있지는 않은가. 마지막 행 이후에 독자가 머물 자리가 남아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는 동안 이 시론 또한 계속 고쳐질 것이다.
시가 완성되는 곳은 마지막 행이 아니라 그 이후일지도 모른다. 독자의 안에서 한 줄이 다시 움직이고, 평범했던 사물이 이전과 조금 다르게 보이는 순간, 시는 비로소 자신의 언어를 벗어난다. 나는 그 순간을 변용이라 부른다. 그리고 그 변용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시는 처음부터 드러나는 쪽으로, 말보다 사물 쪽으로, 소유보다 곁 쪽으로 기울어야 한다고 믿는다.
책속에서
왜 나는 발현에서 시작했는가
세계는 언제나 시보다 먼저 존재한다.
시를 오래 쓰다 보면 자기 문장 속에 반복되는 습관이 보인다. 어떤 시인은 질문으로 시작하고, 어떤 시인은 사건으로 시작하며, 어떤 시인은 강한 고백으로 독자를 끌어당긴다. 나의 시를 돌아보니 나는 대개 아주 작은 장면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문패가 떨어진 자리의 흰 자국, 눈 내린 문 앞의 고요, 유황을 담은 대나무 바구니, 꽃 위에 앉은 호랑나비, 마지막 배가 떠난 뒤 선착장에 남은 밧줄 같은 것들이다.
이 장면들은 처음부터 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의미를 붙이기 전의 모습으로 나를 붙잡았다. 그때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느꼈느냐보다, 그 대상이 어떻게 내 앞에 있었느냐였다. 시는 바로 그 “어떻게 있었는가”를 오래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 순간을 발견이라고 부르기보다 발현이라 부르고 싶었다.
발견에는 발견하는 주체의 공이 크게 느껴진다. 숨어 있던 것을 내가 찾아냈고, 보이지 않던 것을 내 눈이 찾아냈다는 뉘앙스가 있다. 반면 발현은 대상 쪽의 움직임을 더 크게 느끼게 한다. 내가 찾아냈다기보다 어느 순간 그것이 제 모습을 내보였다는 감각이다. 물론 시인은 보고 선택한다. 그러나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 것은 대상의 존재이며, 시인은 그 존재가 드러날 수 있도록 자신의 성급한 해석을 잠시 늦춘다.
이 차이는 시의 윤리를 바꾼다. 시인이 모든 것을 발견하는 주체라면 세계는 쉽게 재료가 된다. 꽃은 사랑의 재료가 되고, 노동자는 연민의 재료가 되며, 빈집은 상실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발현의 관점에서는 꽃도 노동자도 빈집도 먼저 자신의 존재를 가진다. 시인은 그것을 해석하기 전에 그 독자성을 인정해야 한다.
발현은 그래서 겸손의 말이기도 하다. 시인이 작아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더 오래 보고 더 정확하게 선택하기 위해 자신의 관념을 늦추는 태도다. 시인은 문장을 만들 수 있지만 사물의 존재까지 만들 수는 없다. 세계는 언제나 시보다 먼저 존재한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시는 설명에서 관계로 이동한다.
나는 이 시론을 발현에서 시작한다. 왜냐하면 시의 첫 번째 실패는 대상을 너무 빨리 이해하는 데서 생긴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해는 필요하지만 너무 이른 이해는 사물을 닫는다. 발현은 그 닫힘을 늦추고,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상태를 조금 더 오래 견디게 한다. 그 시간이 있어야 현전도, 균열도, 잔여도, 변용도 가능해진다.
발견과 발현은 어떻게 다른가
발견이 “내가 보았다”의 언어라면, 발현은 “그것이 드러났다”의 언어에 가깝다.
발견과 발현은 일상에서는 비슷하게 쓰일 수 있다. 그러나 시론의 용어로 사용할 때 두 말의 방향은 다르다. 발견은 주체가 대상을 찾아내는 쪽에 무게가 실리고, 발현은 대상이 관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이 미세한 차이가 창작의 자세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오래된 빈집을 보았다고 하자. “나는 그 집에서 상실을 발견했다”라고 말하는 순간 시인의 해석은 이미 앞서 있다. 그러나 문패가 떨어진 자리의 흰 자국, 빛 속에서 잠시 몸을 얻는 먼지, 문틈을 지나는 바람을 먼저 바라본다면 상실은 나중에, 혹은 독자의 안에서 스스로 나타날 수 있다. 이것이 발현이다.
발현은 의미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의미가 더 늦고 더 깊게 오도록 하는 방법이다. 의미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와 존재를 통과한 뒤에 의미가 오게 한다. 그래서 발현의 시에서는 설명보다 장면이 먼저 오고, 명사보다 움직임이 먼저 오며, 결론보다 관계가 먼저 온다.
발견은 한순간에 가능하지만 발현은 시간이 필요하다. 같은 대상을 오래 보아야 하고, 처음 떠오른 상징을 의심해야 하며, 가장 익숙한 언어를 걷어내야 한다. “고독한 섬”, “슬픈 빈집”, “아름다운 나비” 같은 표현을 잠시 내려놓고, 섬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빈집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 나비의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아야 한다.
이러한 발현은 시인의 창조성을 약화시키지 않는다. 반대로 더 어려운 창조를 요구한다. 이미 만들어진 관념을 사물에 씌우는 것은 쉽지만, 대상이 자기 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언어 속에 들어오게 하는 일은 어렵다. 시인은 그 어려움을 감수해야 한다.
따라서 발현은 “있는 그대로 쓰기”와도 다르다. 있는 그대로라는 말은 환상이다. 시인은 반드시 선택하고 배열하며 리듬을 만든다. 발현의 핵심은 선택을 하지 않는 데 있지 않고, 선택의 권력을 절제하는 데 있다. 나는 이것을 이후에 “절제된 능동성”이라는 말로 설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