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좀비형 영웅’을 양산하는 상업적 작법서들 속에서
‘신화와 고전의 정신’을 플롯의 뼈대로 다시 세우는 과감한 시도
감상자보다 창작자가 많다는 말이 심심찮게 나오는 시대다. 누구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여러 경로를 통해 세상에 내놓고 감상자와 소통할 수 있다. 그런 만큼 작법서가 쏟아지는 현상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많은 작법서가 사건을 배치하는 기술적인 팁을 전수하는 데 그치고 정작 주인공의 행동이 감상자에게 어떻게 닿는지는 소홀히 한다. 주인공은 독자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 독자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우리는 왜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소비하는가.
주인공은 고민 없이 모험에 나선다. 단련 기간 없이 능력자가 돼 있으며 갈등 없이 새 관계를 받아들인다. 상징 구간을 없애버리고 즉각적인 쾌감을 안겨주지만, 대신 이야기가 끝난 뒤 이어져야 하는 카타르시스, 경이는 삭제된다. 이런 주인공을 신화와 스토리텔링을 오래 연구해온 비교신화학자 김영은 ‘좀비형 영웅’이라고 지적하며 온갖 작법서에 딸려 나오는 플롯 차트가 바로 ‘좀비 공장’을 양산한다고 비판한다. 이런 서사는 이야기를 소비할지언정 이야기를 받아들일 수는 없다. 과연 이야기는 소비하고 버리는 상품에 그쳐야 하는가.
출간 직후 큰 화제를 낳았던 장편 소설 『인 더 백』의 저자이자 국내외 영화감독을 비롯한 뭇 창작자에게 꾸준히 회자되는 『스토리 창작자를 위한 빌런 작법서』를 지은 소설가 차무진은 ‘좀비형 서사’의 원인이 주인공이 응당 밟아야 하는 여정에서 많은 구간이 삭제되거나 뒤엉킨 탓이라고 진단했으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다. 바로 할리우드의 플롯 차트로 여겨지는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12단계 이론’을 난해하기로 소문난 조지프 캠벨의 ‘원질 신화’ 이론과 나란히 세워 비교하고 분석함으로써다. 이에 더해 어째서 원질 신화, 즉 ‘영웅의 여정 17단계’가 현대의 감상자에게 지금까지 설득력이 있는지 카를 융의 ‘집단 무의식론’을 통해 심도 있게 부연하는가 하면, 매력적인 주인공의 결핍 공식과 현명한 반전 사용법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말하는 ‘비극적 결함(hamartia)’과 ‘발견’(anagnorisis)의 개념으로 풀어내고, 프로프의 『민담 형태론』 속 7가지 인물 유형을 분석함으로써 상업적 작법서가 빠지기 쉬운 사건 중심의 전개를 넘어 신화와 고전의 정신을 플롯의 중심에 둔다. 이를 통해 플롯 체크리스트를 주인공의 내면으로 돌린 것이다. 일상 세계에서 벗어나 모험을 떠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이 헤매는 곳은 실상 ‘자신의 내면’이라고 말하는 셈이다. 김영에 의하면 이 책은 ‘좀비형 영웅 처치법’을 알려주는 비법서이며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다’는 대중 서사에 심연까지 부여하라는 무리한 요구를 무리 없이 해”낸 메타창착론이다.
◈ 스토리텔링의 절대 뼈대 : 보글러 12단계와 캠벨의 17단계 완벽 해부,
<오디세이>부터 <케이팝 데몬 헌터스>까지 압도적으로 풍성한 사례
캠벨의 17단계는 출발-입문-귀환이라는 3막의 거대한 순환 구조를 띠는데, 이는 영웅이 일상에서 벗어나(소명), 기득권의 억압이자 세상의 율법(아버지와의 일체화)을 극복하고, 세상을 구원할 에너지(궁극의 보상)를 쥐고 돌아와 두 세계의 마스터가 되는 궤적을 그린다. 단순한 모험을 극복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아를 재조립하는 ‘정신적 분해와 영적 각성’의 과정이다. 보글러는 캠벨의 이 ‘영웅의 여정’ 17단계를 할리우드 영화와 현대 소설의 속도감에 맞춰 12단계로 압축했다. 철학적이고 심리적 상징을 제거하고 창작자가 당장 이야기에 적용할 수 있도록 ‘사건과 플롯의 단계’로 작업한 것이다. 흔히 ‘영웅의 여정’을 언급할 때, 사람들은 캠벨의 17단계나 보글러의 12단계를 기계적으로 떠올린다. 대학의 강의실이나 수많은 스토리텔링 아카데미에서 ‘영웅의 여정’을 필수 교범처럼 가르치지만, 막상 창작자가 그 내용을 원고에 적용하려 들면 막연했다. 이 책은 총 3개의 막(출발-입문-귀환)과 12개의 장으로 구성된다. 그 12개의 장이 바로 캠벨의 원질 신화(영웅의 여정 17단계)가 말하는 내적 성장의 공식을 밖으로 드러내는 여정으로 변형한 보글러의 12단계 이론에 준한 것이다. 다음과 같다.
1단계 <일상 세계> → 2단계 <소명> → 3단계 <소명의 거부> → 4단계 <정신적 스승과의 만남> → 5단계 <첫 관문의 통과> → 6단계 <시험, 협력자, 적대자와의 만남> → 7, 8단계 <동굴의 가장 깊은 곳과 시련> → 9단계 <보상> → 10단계 <귀환의 길> → 11단계 <부활> → 12단계 <영약을 가지고 귀환>
주인공이 만족 혹은 불만족하는 일상 세계를 보여주고, 소명을 받은 주인공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도입부에 힘이 생기는지, 그 태도를 어떤 식으로 연출해야 하는지 설명해준다. 그다음, 멘토(정신적 스승)에게서 ‘매직 아이템’을 얻어 첫 관문을 통과하고, 협력자 및 적대자와 마주해 깊은 내외적 시련을 이겨내며, 개인적인 보상(영약/엘릭시르)을 얻어 클라이맥스에서 부활하고, 마지막에 그 영약(엘릭시르)을 공동체에 전달하는 주인공의 여정을 캠벨, 보글러, 아리스토텔레스, 융, 프로프 등 각종 인문학적 이론을 동원해 심도 있고도 친절하게 분석해준다. 그 과정에서 보글러의 12단계가 캠벨의 17단계와 어느 지점에서 일치하고, 또 어느 지점에서 변별되는지를 분석한다. 책 가장 앞머리와 막별 첫머리에 배치된 ‘캠벨과 보글러 이론의 등치표’는 이 방대한 서사론의 단계를 짚어가는 동안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며, 책 곳곳에 풍성하게 들어간 각종 이미지 자료와 도표 역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이때, 눈에 띄는 점은 압도적으로 풍성한 사례다. 영화 <비트>(1997)의 시나리오 작가 심산의 표현대로 이 책은 유별날 정도로 상세하게 사례가 되는 작품을 설명한다. 차무진에 의하면 상징과 은유로 가득한 캠벨과 보글러의 이론을 가장 빠르게 이해하는 길이 바로 구체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주인공의 대사, 행동, 배경, 상황까지 그 작품을 접하지 않은 독자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서술하는 것이 그가 선택한, 창착론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로서의 ‘책임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오디세이>, ‘해리포터’ 시리즈. <케이팝 데몬 헌터스> <사운드 오브 뮤직> <타이타닉> 등 사례가 되는 영화, 드라마, 게임 등의 작품 선별 기준도 주목할 만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폭넓은 호응을 받은 작품, 2000년 이전의 영상물과 소설, 애니메이션, 게임 서사가 그 분석의 대상이다. 그 시대가 전 세계적으로 대중 서사를 정립한 시대이기 때문이며, 한 시대를 휩쓴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 캐릭터의 미학인 이야기 속 8가지 캐릭터 원형을 전격 분석하다,
남의 이론을 옮겨 적는 이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배짱
또 이 책은 캐릭터의 원형을 분석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주인공이 여정을 끝까지 걸으려면 그를 이끌고, 막아서고, 속이고, 비추는 인물들이 필요하다. 보글러는 카를 융의 원형 개념을 빌려 이들을 여덟 원형으로 정리했다. ‘영웅, 전령관, 정신적 스승, 관문수호자, 그림자, 협력자, 변신자재자, 익살꾼’이다. 차무진은 그 원형들을 ‘영웅의 여정’ 단계의 해당 장 말미에 넣어 심층 해부한다. ‘그림자’ 원형 분석 장을 보면 방식이 드러난다. 융의 정의, 캠벨의 원질 신화, 보글러의 작법, 프로프의 기능을 그림자 원형 위에 겹친 뒤 하나의 관점으로 모은다. 악당은 주인공의 그림자가 밖으로 걸어 나온 존재라는 것이다. 이 관점을 〈다크나이트〉의 배트맨과 조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에블린과 조부 투파키로 확인한다. 이어 회개하는 악당을 설계하는 세 가지 조건과 다 쓴 원고를 점검하는 다섯 가지 질문까지 내놓는다.
눈에 띄는 점은 보글러가 정리한 8개의 캐릭터 원형이 『주인공은 왜 돌아다니는가』에는 7개로만 정리돼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의도적으로 제외한 원형은 ‘주인공’이다. “주인공은 12단계를 거쳐 영약을 가지고 돌아온 후에라야 비로소 영웅이” 되고, “‘영웅’이라는 원형의 설명은 결국 이 책 전체가 대신”하기 때문이다. 책 한 권이 통째로 그 항목의 설명인 셈이다. 심산의 말처럼 “이런 배짱은 남의 이론을 옮겨 적는 사람에게서는 나오지 않는다.”.
◈ 캠벨도 보글러도 아닌 차무진의 고유한 창작론,
‘쓰는 사람’에게도 ‘쓰지 않는 사람’에게도 유용한 인문 교양서
그 밖에 보글러의 12단계를 배치하는 데에서도 차무진만의 관점이 엿보인다. 그것은 일곱 번째 단계〔동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진입〕과 여덟 번째 단계인〔시련〕을 ‘죽음을 통과하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하나의 장에 묶은 지점에서다. 차무진은 이에 대해 “이것은 이야기이기 때문”이며 두 단계가 “이야기의 심장”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많은 상업적 작법서가 그 책에서 제공하는 매뉴얼을 따라 원 스텝 투 스텝 차근차근 밟을 것을 권장함으로써 이야기에 얼마나 많은 변수가 작용하는지, 각 단계가 얼마나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하는지를 간과한다. 차무진은 보글러의 플롯 차트 역시 그런 식으로 잘못 활용돼 주인공을〔동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진입〕시킨 다음 한 호흡 쉬고〔시련〕을 배치하는 순간, 인과적으로 몰아쳐야 하는 구간에 끊김이 생긴다고 지적한다. 이뿐 아니다. <죠스>나 <스타워드 에피소드 5: 제국의 역습>의 서사를 분석할 때에도 보글러가 〔보상〕 단계로 본 지점을 차무진은 〔동굴의 가장 깊은 곳으로 진입〕으로 해석함으로써 할리우드의 스토리 교과서로 여겨지는 보글러의 이론조차 다각도로 해석할 때 자기만의 서사를 완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책은 오로지 스토리 창작만을 위한 책일까? 물론 이 책은 대중문화 평론가 김봉석의 말처럼 작가와 작가 지망생을 위한 책이다. 작법서이자 대중 서사 전반에 대한 해설서이며 작가들이 자신의 서사를 다 쓴 뒤 활용해야 할 ‘검수용’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소설가 장강명의 말대로 “책장을 덮었을 때 이 책이 가장 필요한 예비 독자는 직업 창작자나 비평가가 아닌 사람들”, 즉 “쓰지 않는 사람”이기도 하다.
대중이 이야기에 열광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이겠으나, 주인공의 여정을 자신의 삶과 나란히 세우게 되는 심리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모두 자신의 이야기를 써가는 존재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현실은 자신이 영웅이나 주인공이 아닌 듯한 기분으로 설명될 때가 많다. 이에 시련과 역경을 피하려고만 들고, 관계의 어려움으로 혼란스러워하기도 한다. 이 책은 그런 평범한 보통의 감상자들에게 어떻게 해야 우리가 영웅이, 또 주인공이 될 수 있는지, 우리의 삶이 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는지 원고뿐 아니라 삶까지 검수하게 해주기에, 결국 쓰는 사람에게도 쓰지 않는 사람에게도 유용한 교양서가 된다. 『주인공은 왜 돌아다니는가』라는 질서정연하고 풍성한 내용의 책을 일독하는 순간 독자는 풀코스 정찬을 먹은 듯한 만족감을 얻는 동시에 내 인생의 주인공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