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AI가 더 나은 답을 내놓는 시대, 인간의 마지막 직무는 무엇인가
AI에 관한 책은 대개 두 방향으로 흐른다. 더 많은 일을 기계에 맡기는 방법을 설명하거나, 그래도 인간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찾아 위안을 건넨다. 『서명하는 인간』은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다. 저자는 AI가 계속 발전해 인간이 수행하던 분석과 추론의 상당 부분을 더 잘하게 될 것이라는 전제를 피하지 않는다. 그 전제를 끝까지 밀어붙였을 때 비로소 보이는 인간의 자리를 묻는다.
이 책은 먼저 우리가 매일 뒤섞어 사용하는 계산, 선택, 결정, 판단을 분리한다. 계산은 규칙과 입력이 주어진 일이고, 선택은 주어진 대안과 기준 사이의 일이며, 결정은 숙고의 시간을 닫는 행위다. 판단은 다르다. 판단은 기준이 더 이상 답을 강제하지 못하는 곳에서 선을 긋고, 그 선이 일으킬 결과를 자기 이름으로 인수하는 일이다.
이 정의에 도달하기 위해 저자는 철학과 현장을 함께 통과한다. 칸트에게서 규칙이 자신의 적용법을 알지 못한다는 균열을 발견하고, 아리스토텔레스와 폴라니에게서 문서로 이전되지 않는 지혜를 읽는다. 한나 아렌트에게서는 책임이 증발하는 조직의 구조를, 한스 요나스에게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에게까지 도달하는 책임의 시간을 가져온다. 클라우제비츠의 안개, 에어프랑스 447편의 조종실, 부동산 위험 기준을 정하던 회의와 공공 프로젝트의 데이터 현장이 하나의 논증 안에서 연결된다.
책은 인간의 판단을 낭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동화에 일을 맡기는 모든 선택이 국소적으로는 합리적이면서도, 그 경로 전체가 인간의 판단력을 침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계가 분석을 대신하는 동안 인간은 검토한다고 믿으며 통과시키는 사람이 되고, 기준은 판단을 돕는 받침대에서 판단을 면제하는 방패로 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경고에서 멈추지 않는다. 무엇을 끝내 위임하지 않을 것인지 기록하는 비위임 목록, 결론만이 아니라 당시의 안개와 기각된 대안을 보존하는 판단 일지, 인간과 AI의 불일치를 학습의 출발점으로 삼는 동거 규약, 합의의 단일경작을 막는 이견의 면역계를 제안한다. 이는 AI를 거부하는 설계가 아니라 AI와 함께 일하면서도 인간의 판단이 죽지 않게 만드는 구조다.
마지막에 책은 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내려간다. 전문가의 값은 무엇에서 나오는가. 작은 판단의 사다리가 사라진 조직에서 다음 세대의 전문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모든 기술적 기능이 대체된 뒤에도 인간은 왜 서명하는 존재로 남아야 하는가.
판단은 인식에서 완성되지 않는다.
인수에서 완성된다.
『서명하는 인간』은 AI 활용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다. AI 시대에 인간이 어떤 위치에서 일하고, 무엇을 끝내 자기 이름으로 감당해야 하는지를 묻는 책이다. 심사하고 승인하고 진단하고 평가하고 결재하는 사람, 자신의 결론 아래 이름을 적는 것이 일의 마지막 절차인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질문을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