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60 년의 누명을 쓴 진통제와 '영웅'이라 불린 마약
타이레놀의 성분 아세트아미노펜은 1893 년 권위 있는 생리학자에게 위험한 물질로 지목된 뒤 오랫동안 외면받았다. 누명을 벗긴 사람은 생화학자 브로디와, 박사 학위도 없던 연구 보조원 액설로드였다. 반대로 바이엘은 모르핀에 아세틸기를 붙인 물질에 '영웅'이라는 뜻을 담아 헤로인이라 이름 짓고, 중독 없는 약이라고 광고했다. 아스피린은 분자가 거의 그대로인데도 시대마다 자연의 진통제, 산업의 혁신, 빼앗아야 할 적국의 자산, 심혈관 예방약으로 다르게 읽혔다. 진통제와 마취제를 다루는 1 부는 약의 운명을 바꾼 것이 성분만은 아니었음을 보여주고, 약국 선반 위의 흔하게 볼 수 있는 약을 다시금 보게 한다.
▼ 천연두와 맺은 계약, 1918 년 독감의 수사 기록
2 부는 감염병과 당뇨병, 영양 결핍을 다룬 약의 역사를 장마다 다른 틀로 풀어낸다. 항생제 장은 병원균만 골라 맞히는 '마법의 탄환 을 찾는 여정이고, 백신 장은 천연두와 인류의 관계를 강제 계약에서 시작해 면책 조항과 약관 변경을 거쳐 1980 년 계약 종료에 이르는 한 편의 계약서로 읽는다. 스페인 독감 장은 수사 보고서다. 1951 년 알래스카 영구동토층에서 빈손으로 돌아온 스물일곱 살 대학원생 훌틴은 46 년 뒤 일흔셋의 나이로 다시 그 땅을 찾아 '루시'라 이름 붙인 희생자의 폐 조직을 채취했고, 이 시료로 1918 년 바이러스의 유전체가 복원되었다. 노벨상 상금을 나누고 특허를 1 달러에 넘긴 인슐린 미담의 이면, 각기병을 막으려던 일본 해군의 식단에서 카레라이스가 퍼진 사연도 이어진다. 연표를 외우는 부담 없이 과학사의 굵직한 장면을 이야기로 만나게 한다.
▼ 피임약에서 위고비까지, 욕망과 만난 약
1960 년 경구 피임약은 환자가 아닌 건강한 사람의 삶을 설계하려고 승인된 첫 의약품이 되었다. 3 부는 이처럼 약이 치료의 영역 밖으로 나와 욕망과 만나는 장면을 다룬다. 몸을 자동차에 빗댄 체중 조절제 장은 갑상선 호르몬, 제 1 차 세계대전 때 폭약에 쓰이던 DNP 에서 시작해 약 18 조 원의 배상 기금을 남긴 펜펜, 대규모 임상시험 끝에 퇴출된 리덕틸, 주 1 회 주사로 시장을 바꾼 위고비까지 살을 빼려는 시도가 치른 대가를 보여준다. 탈모 치료제 장은 후기와 소문이 검증된 정보를 밀어내는 시장을, 우울증 치료제 장은 항우울제와 ADHD 치료제에서 우연히 발견된 효과를 설명하려고 나중에 이론을 세운 과정을 짚는다. 기대와 과장이 뒤섞인 약 앞에서 무엇을 묻고 따져야 하는지 알려준다.
▼ 실패한 실험에서 태어난 약, 기록에서 지워진 이름
리도카인은 실패한 농약 연구에서 나왔다. 보리의 해충 방어 성분 그래민을 농약으로 만들려던 연구는 살충 효과가 없다는 결론과 함께 중단되었다. 그 과정에서 나온 화합물에서 국소 마취제의 가능성을 본 에르트만은 학부생 뢰프그렌과 연구를 이어갔지만, 연구비를 대던 회사가 등을 돌리자 그마저 손을 뗐다. 혼자 남은 뢰프그렌은 밤에 강의해서 번 돈으로 시약을 샀고, 학부생 제자 룬드퀴스트와 함께 오늘날 국소 마취제의 표준이 된 리도카인을 만들었다. 저자는 이 과정을 심리학자 더크워스가 말한 '그릿', 곧 방향을 바꾸지 않는 열정과 멈추지 않는 끈기로 읽고, 학부생 제자들과 꾸려가는 자신의 연구실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다.
기록에서 밀려난 이름도 함께 불러낸다. 아스피린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는 주장이 있는데도 공식 기록에 역할이 충분히 반영되지 않은 아이헨그린, 밴팅보다 몇 달 앞서 췌장 추출물의 효과를 발표하고도 외면당한 파울레스쿠, 비타민 B1 을 처음 분리하고도 '비타민'이라는 개념을 세운 공을 유럽 과학자에게 내준 스즈키 우메타로가 그들이다. 위대한 발견이 몇몇 천재만의 몫이 아니었음을 일깨운다.
▼ 약국 조제대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설명
2009 년 신종플루가 번지던 때, 거점병원 약국에는 평소의 서너 배에 이르는 처방전이 밀려들었고 거의 모두가 타미플루였다. 내성을 걱정하는 환자들에게 저자는 끝까지 복용하라는 원론적인 답밖에 할 수 없었다. 이 책의 Lab box 에서 저자는 그때 다 하지 못한 설명을 뒤늦게 건넨다. 바이러스 효소의 아미노산 하나가 바뀌면 왜 타미플루가 듣지 않는지를 구조 그림으로 보여주는 식이다. 책 곳곳에는 현장의 기억도 담겼다. 영업사원으로 리덕틸을 팔던 시절, 퇴출로 이어질 임상시험이 막바지였는데도 현장에는 구체적인 정보가 내려오지 않았다는 고백이 있고, 영국 노팅엄의 드럭스토어에서 이부프로펜 열 알이 50 펜스에 팔리던 풍경이 있다. 약을 둘러싼 과학과 산업을 안쪽에서 지켜본 저자는 독자에게 약을 이해할 언어를 쥐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