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도, 아이들도 함께 ‘신나는’ 밝고 따스한 동시
이정록 시인은 머리말에서, 동시를 처음 쓰기 시작할 때의 즐거움과 설렘을 ‘자전거 타기’에 비유했다. 동시를 쓰기 시작하며, 어릴 적 자전거를 처음 배울 때 핸들을 조정하던 조심스러운 손짓과 들썩이는 엉덩이, 수렁논에 처박히곤 했던 실수를 떠올렸다고 고백한다. 20년 동안 시를 써 오며 익은 말법을 버리고, 이전과 전혀 다른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과 통하는 새로운 말법으로 사물을 보고 그리려 한 시인의 노력이 엿보인다. 그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자전거 타기를 성공하는 순간부터 자전거를 ‘신나게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처럼, 동시도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일이란 점을 강조한다. 시를 쓰는 시인도, 읽는 독자들도 신나게 즐길 수 있는 게 바로 ‘동시’라는 걸 『콧구멍만 바쁘다』는 보여준다.
앞니 두 개 뽑았다./대문니가 사라지자/말이 술술 샌다./침이 질질 흐른다./웃으면 안 되는데/애들이 자꾸만 간지럼 태운다./갑자기 인기 짱이다./귀찮아서 죽겠다./입 다물고 도망만 다닌다./콧물 들이마시랴 숨 쉬랴/콧구멍만 바쁘다. (「바쁜 내 콧구멍」)
표제작 「바쁜 내 콧구멍」은 근래 보기 드문 ‘동적’인 시다. 뛰어노는 아이들, 그 아이들의 숨소리가 그대로 느껴진다. 쫓기는 아이도, 쫓는 아이들도 모두 신이나 한바탕 어우러진 모습이 눈앞에 훤히 그려진다. 콧구멍을 들락날락하는 숨과 술술 새는 말, 질질 흐르는 침과 콧물과 함께 한데 어우러져 깔깔대는 아이들이 책장 가득하다. 읽는 이들마저 그 달리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정록 시인은 특히 아이들의 눈높이에 꽤나 민감하다. 그의 동시에는 교훈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 않으며, 말법은 아이들의 그것처럼 발랄하며 쉽고 자연스럽다.
우리 학교/담장을 모두 없앴다./(중략)/개구멍이 없어지자 꿀밤도 사라졌다./다리는 울타리 밖에서 버둥버둥/눈알은 담장 안에서 뱅글뱅글/쿵쾅거리던 가슴도 없어졌다./여러분이 똥갭니까, 도둑입니까?/교장 선생님의 꾸중도 사라졌다./집에서 교실까지 지름길이 생겼다./아침마다 오 분은 더 잘 수 있다. (「꿀잠」)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담장을 모두 없앴다. 그로써 생겨난 이점들을 아이의 눈높이에서 기술하고 있는 시가 바로 「꿀잠」이다. 물리적 경계로서의 학교 담장이 허물어지면서, 거기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삭막함과 단절감 그리고 감시와 억압만이 있던 자리에 작은 평화와 소통, 해방감이 깃드는 것이다. 이런 시는 그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자칫 이분법의 구도 안에 갇혀 납작한 계몽주의 시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시인은 그러나 오 분 간의 늦잠이 ‘꿀잠’이 되는 이유를 어른의 단정적인 설교가 아니라 실감 있는 아이의 어조로 펼쳐 보임으로써 그런 한계를 가볍게 뛰어넘는다.
대상을 향해 빈정거리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 시인의 말법은 아이들의 솔직한 목소리 그대로를 드러낸다. 목욕탕에서만 운동하는 뚱보 아빠에게 “목욕탕에서만 운동하는 뚱뚱보 우리 아빠” (「뚱보 아빠」)라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아침에 화장실이 급할 때는 “아빠 먼저”라며 새치기를 하면서, 저녁에 엄마가 이 닦으라고 하면 “니들 먼저” (「누가 먼저」)라고 발뺌하는 아빠의 이중적인 언행을 유머스럽게 꼬집기도 한다. 또, 학교 갔다와서 곧장 학원에 가고 숙제 마친 뒤 겨우 짬 내서 오락하는데 “당장 끄지 못해!”(「당장 끄지 못해」)라고 윽박지르는 부모의 횡포, “넘치는 것보다 모자라는 게 좋은 거라”면서도 “쓰레기봉투는 “배불뚝이”(「쓰레기봉투」)가 되어 터지게 만드는 엄마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와 분단 시대를 거치며 우리 동시 속 아이들은 당당한 목소리를 잃고, 어른의 교육에 순응하는 얌전한 ‘범생이’와 ‘소심파’ 들만 남았다. 우리 동시가 다시 살아나는 길은 당당하고 솔직한 아이들의 살아 있는 육성을 불러내는 길에 있다고 볼 때, 이정록의 다음 동시는 그 싹을 보여준다.
채찍 휘두르라고/말 엉덩이가 포동포동한 게 아니다.//번쩍 잡아채라고/토끼 귀가 쫑긋한 게 아니다//아니다./꿀밤 맞으려고/내 머리가 단단한 게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3연에 등장하는 아이의 발언이다. 이 아이는 어릴 때부터 엉덩이 깨나 맞아본 듯하고, 여전히 꿀밤은 예사로 맞는 듯하다. 하지만 벌을 주는 어른들의 바람과 달리, 아이가 벌을 통해 깨달은 것은 반성 대신 항변이다. 언뜻 보면 개구진 아이의 불만 한 마디 같지만, 이를 통해 아이들 독자가 느낄 공감이나 어른 독자가 느낄 반성은 대단히 크다.
새는/다 날아갔다.//오소리는/굴을 잘 막았을까?//하늘다람쥐는/불길보다 빨리/나뭇가지를 건너뛰었을까?//새소리도/다 날아갔다.//둥우리 속/새알들은 어찌 됐을까?//빨간 토끼 눈은/어딜 보고 있을까? (「산불」)
「산불」 에서 시인은, 인간의 실수로 일어났을 것이 뻔한 산불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생명들을 단순한 연민의 눈이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으로 껴안고 있다.
이 모든 생명들이, 다시 제자리를 찾아 제 목숨을 다해 바쁘게 살아야 한다고 이 동시집은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