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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 창비시선 449
창비 2020.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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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_얼굴을 뵌 지 오래되었다
그릇
수치에 대하여
당하
연못을 들이다
꽃밭의 경계
편지
호미
배차적
안동
환한 사무실
삼례에서 전주까지
너머
시 창작 강의
고모
임홍교 여사 약전

제2부_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경행(經行)
귀띔
익산미륵사지서탑금제사리봉안기(益山彌勒寺址西塔金製舍利奉安記)
무빙(霧氷)
우수(雨水)
울진 두붓집
묵란(墨蘭)
줄포만
줄포시외터미널
장마
진천에서
군인이 집으로 돌아간다면
자두나무가 치마를 벗었다
뒤척인다
키 작은 어른

제3부_작약작약 비를 맞네
식물도감

해설|김종훈
시인의 말
저자 소개
저자 :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 『모닥불』 『그대에게 가고 싶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그리운 여우』 『바닷가 우체국』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하여』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간절하게 참 철없이』 『북항』,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연어 이야기』 『관계』, 동시집 『나무 잎사귀 뒤쪽 마을』 『냠냠』 『기러기는 차갑다』, 산문집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 『안도현의 발견』 『잡문』 『그런 일』 『백석 평전』 등을 펴냈다. 소월시문학상, 노작문학상, 이수문학상, 윤동주상, 백석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단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있다.
저자 소개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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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2013년 절필을 선언했던 시인은 2017년 월간 『시인동네』 5월호에 신작시 「그릇」과 「뒤척인다」를 발표하며 창작활동을 재개했다. 스스로 내린 금시령(禁詩令)을 풀고 4년 만에 발표한 것인 만큼 이 두편의 시는 자못 의미심장하다(시인은 당시 “며칠 동안 뒤척이며 시를 생각하고 시를 공부하는 마음으로” 썼다고 SNS에 글을 쓰기도 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그릇」)했던 허물을 돌이켜보고, “비유마저 덧없는, 참담한 광기의 시절”(산문집 『그런 일』)을 ‘뒤척이고 부스럭거리고 구겨지며’ 울음 같은 침묵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던 번민의 시간을 견뎌온 막막한 심정이 절절하게 와 닿는다.

시인은 이제 “한가한 비유의 시절”을 넘어 “아직 쓰지 못한 것들의 목록”(「너머」)을 적어나간다. 그리고 “이제 좀 고독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시 창작 강의」)에 이르러 저 ‘너머’의 세상에 자신을 풀어놓으며 삶과 시의 경계에서 내면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시인은 또 약전이나 약력의 형식을 빌려 “폐허가 온전한 거처”(「안동」)였을 하찮은 존재들의 가련한 생애와 소소한 일상에 깃든 ‘시적 힘’을 언어로 되살려낸다. 한편, 「식물도감」이라는 독특한 제목을 단 3부의 촌철살인과도 같은 짧은 시들은 자연현상을 관찰하는 예리한 감각과 섬세한 시선의 식물적 상상력이 돋보인다. “귀신같은 예감”(염무웅, 추천사)으로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무빙(霧氷)」) 경이로움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자연의 섭리와 삶의 비의를 찾아내는 통찰력이 놀랍고 감탄스럽다.

안도현 시인은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문학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시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그가 한국 서정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라는 점에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을 것이다. 8년 만에 시집을 펴내면서 시인은 “대체로 무지몽매한 자일수록 시로 무엇을 말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며 자신을 한껏 낮추면서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시인의 말)고 털어놓는다. 그러나 시인은 시력 36년의 연륜을 거쳐 “자신을 녹이거나 오그려 겸손하게 내면을 다스”(「호미」)려왔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이 쓸쓸한 시대에 시를 쓸 것이며, “펼친 꽃잎/접기 아까워” 작약이 “종일 작약작약 비를 맞”(「식물도감」)는 소리를 들려줄 것인가.

『연어』의 주인공 은빛연어가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듯 시인은 40년의 타향살이를 접고 고향 경북 예천으로 돌아왔다. 1981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 「낙동강」의 무대이자 유년기의 젖줄과도 같았던 내성천 자락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시인은 연못을 들이고 돌담을 쌓고 꽃밭을 일군다. 그러나 시인에게 귀향은 “세상의 풍문에 귀를 닫고”(「연못을 들이다」) 한가로이 음풍농월의 삶에 안주하려는 정착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처럼 보인다. 시인은 “내 안에 당신을 들이”고 “당신의 숨소리를 받아 내 호흡으로 삼”(「연못을 들이다」)아 겸손한 마음으로 시의 텃밭을 일구며 “노루귀만큼만 물을 마시고/노루귀만큼만 똥을 싸고/노루귀만큼만 돈을 벌”(「식물도감」)어도 행복한 세상을 느릿느릿 가꾸어갈 것이다. 그리고 더욱 치열하게 시를 쓰고 또 쓸 것이다. ‘시인 안도현’과 ‘자연인 안도현’이 어우러진 새 시집 곳곳에는 시심을 다시 가다듬고 정성스레 쌓아올린 돌담 사이로 다사로운 햇살이 스며든다. 평화롭다. “중년을 지나며 바야흐로 귀향길에 오른 안도현 문학의 새 발걸음에 괄목(刮目)의 기대를 보낸다.”(염무웅, 추천사)

책 속으로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란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그릇」 부분

길가에 핀 꽃을 꺾지 마라
꽃을 꺾었거든 손에서 버리지 마라
누가 꽃을 버렸다 해도 손가락질하지 마라
―「귀띔」 전문

허공의 물기가 한밤중 순식간에 나뭇가지에 맺혀 꽃을 피우는 현상이다
중심과 변두리가 떼어져 있다가 하나로 밀착되는 기이한 연애의 방식이다
엉겨 붙었다는 말은 저속해서 당신의 온도에 맞추려는 지극한 정신의 끝이라고 해두자
멋조롱박딱정벌레가 무릎이 시리다는 기별을 보내올 것 같다
상강(霜降) 전이라도 옥양목 홑이불을 시쳐 보낼 것이니 그리 알아라
―「무빙(霧氷)」 전문

그리운 게
없어서
노루귀꽃은 앞니가
시려

바라는 게
없어서
나는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

내소사 뒷산에
핑계도 없이
와서

이마에 손을 얹는
먼 물소리
―「우수(雨水)」 전문

사무치자
막막하게 사무치자
매화꽃 피는 것처럼 내리는 눈같이

노루귀만큼만 물을 마시고
노루귀만큼만 똥을 싸고
노루귀만큼만 돈을 벌자

호박씨 한알 묻었다

나는 대지의 곳간을 열기 위해
가까스로 땅에 열쇠를 꽂았다

잔디 깎다가
방아깨비 두어마리 허리도 잘랐다
그러고도 나 저녁밥 잘 먹었다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식물도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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