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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11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저자 : 렌조 미키히코
‘장르적 재미’와 ‘문학적 예술성’으로 독자들로부터는 탄성을 자아내고, 동시대 작가들에게는 경외에 찬 질시를 받은 천재 작가.
년 나고야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년 《변조, 둘이서 한 옷 입기》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탄식이 터질 만큼 유려한 문체, 기예에 가까운 치밀한 트릭, 비교를 불허하는 강렬한 여운으로 렌조 미키히코만의 매혹적인 미스터리 세계를 구축했다.
《회귀천 정사》로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 《달맞이꽃 야정》으로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신인상, 《연문》으로 나오키상, 《숨은 국화》로 시바타 렌자부로상을 수상했다.
2013년 타계했다.
렌조 미키히코의 열렬한 팬으로 알려진 이사카 고타로는 《백광》을 두고 “충격이 연속으로 이어지는 더할 나위 없는 렌조 미키히코표 미스터리의 걸작”이라는 극찬을 보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각 장마다 화자가 바뀌며 고백하는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그때마다 사건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는데, 고백이 끝날 때마다 독자들로부터
‘뭐, 정말 그랬던 거야?’라는 비명이 절로 터져 나오게 만드는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운 반전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렇다, 《백광》은 《은하영웅전설》의 작가 다나카 요시키가 “이런 작가가 있는데 어떻게 미스터리를 쓸 수 있겠는가!”라며 경탄을 금치 못했던 그 렌조 미키히코의 마스터피스다.

역자 : 양윤옥
일본 문학 전문 번역가. 히라노 게이치로의 《일식》을 번역해 ?년 일본 고단샤에서 수여하는 노마문예번역상을 수상하였다. 대표적인 번역서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Q》,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여자 없는 남자들》, 히가시노 게이고의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악의》, 《유성의 인연》, 《녹나무의 파수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지옥변》,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 스미노 요루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 《어리고 아리고 여려서》 외 다수의 작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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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평범한 일가족의 내면을 잠식한
끔찍한 욕망에 대한 이야기

치매 증세가 있는 노인 게이조는 아들 류스케와 며느리 사토코, 그리고 손녀딸 가요와 한 지붕 아래에서 편안한 노후를 보낸다. 하지만 며느리 사토코 여동생의 딸 나오코가 시체로 발견되자 평범한 일상은 단번에 산산조각이 난다. 그러자 사토코의 입에서 이렇게 진실이 새어 나온다. “이 집이 평범하고 평온했던 일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그런 척했을 뿐이다.”(p.193)
거리낌 없이 불륜을 저지르고 전리품 삼아 아이를 낳는 여자, 아내의 불륜 사실은 묵인한 채 자살을 시도하는 남자, 효부며 지혜로운 아내며 다정한 엄마 역할이 지긋지긋한 여자, 수십 년 전 남태평양에서 저지른 살인의 추억에 빠져 사는 남자까지, 보통 사람들로 보이는 일가족은 내면에 욕망, 질투, 배신감, 복수심, 심지어 살의가 들끓는 남녀일 뿐이다. 『백광』은 ‘평범’과 ‘평온’, ‘보통’과 ‘상식’이 얼마나 쉽게 깨지기 쉬운 연약한 가면인지를 샅샅이 들추어낸다.
렌조 미키히코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뛰어난 문학성과 특유의 매혹적인 작풍으로 유감없이 펼쳐 보인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를 충동질하는 몸, 제 몸이 명령하는 대로 살아가는 뜨겁고 유연한 액체 유리”(p.225)로 묘사되는 인물 유키코는 도덕 혹은 윤리에 비해 욕망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상기시킨다. 또한 살갗을 휘감는 한여름의 무더위, 남태평양 섬의 원색적 화려함, 어둡고 끈적거리는 듯한 집안 분위기를 뒤엉키듯 교차시키면서 보통 사람들이 평온해 보이는 일상 아래에 숨겨두고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 위태롭고 어두운 욕망과 그로 인해 일그러진 내면을 감각적인 은유로 전달한다.


이런 미스터리를 읽고 싶었다!
치밀하게 설계된 트릭과 연쇄적 반전이 주는 충격적 쾌감

소설의 모든 요소에 트릭이 설계돼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백광』은 인물의 캐릭터 설정, 인물의 발화, 상황에 대한 묘사, 사건의 전개 방식까지 ‘모든 것이 트릭’이다.
“착하고 관대한 남자”(p.172)로 소개된 인물이 “따분하고 아무 매력도 없는 사람”(p.59)으로 일컬어진다든가, “나는 지금 너(남성)을 껴안고 싶어”(p.115)라고 말하며 유혹했던 다케히코가 “나는 여자에게만 관심이 있는 남자야.” “네가 내 아내의 몸에서 맛본 쾌락은 내게서 훔쳐 간 것이니까 짐승에게 폭행을 당하는 혐오스러운 방식으로 그 대가를 치러줬으면 하는데, 어때?”(p.115)라고 말하며 겁박한다든가, 시스루 옷에 대해 “가린다기보다 오히려 검은 망사 너머로 살빛을 강조해서 보는 사람을 자극하려는 것 같았다”(p.95)라는 식으로 독자가 예상할 수 있는 상상력의 범주를 가뿐히 뛰어넘는다.
무엇보다도 혼을 쏙 빼놓는 것은 ‘고백’이라는 서술 기법을 통한 일곱 번의 연쇄적 반전이다. 진실을 토로하겠다며 고백하는 각각의 등장인물들. 하지만 그다음 인물의 고백을 들어보면 앞에서 들은 고백은 단지 그 사람만의 진실, 혹은 그 사람을 위한 진실이었고, 오히려 거짓된 범인을 유추하게 하는 트릭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렇듯 일곱 명의 고백에 잇따르는 일곱 번의 반전이 주는 의외성이 독자를 충격으로 몰아넣는다. 독자의 예측을 유도하고 그 예측을 매번 뒤엎는 치밀하게 계산된 문장의 힘에 독자들은 그저 놀랄 수밖에 없다.


“죽이려고도 했지만, 살리려고도 했어요.”
진실은 이분법 너머에 있다

『백광』은 반의어의 충돌로 가득하다. 선과 악, 죄와 벌, 사랑과 증오, 믿음과 배신, 고백과 거짓말, 사람과 인형(사람인 척하는 사물), 치매와 치매인 척하기. 세상만사가 이분법으로 분명히 나뉜다면 혼돈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모두가 별다른 의도가 없었음에도 죄를 짓게 됨을 현실적으로 보여주며 독자를 섬뜩하게 만들고 혼돈에 빠뜨린다. 상반되는 개념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의 기교는 트릭이나 반전의 재미로만 쓰이는 것이 아니라 주제 의식으로까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또한 이 소설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여러 번 뒤엎으며 좋음과 나쁨의 경계를 허물고 나서 분명한 선악의 기준을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누군가에게는 선이 다른 이에게는 악이라면, 무엇이 선이고 또 무엇이 악인가. “여름 한낮의 하얀 빛에 녹아들어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도 지금껏 분명하게 생각나지 않”(p.168)는 것처럼 진실은 “탁한 유리창 몇 겹 너머에 놓고 바라보는 듯 희미”(p.9)한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


<책속에서>
만세 소리와 아내의 미소로 배웅을 받으며 죽음의 길을 떠났던 전쟁 통의 그날 밤, 그리고 천신만고의 항해 끝에 도착한 남태평양의 섬, 허연 불꽃처럼 작열하는 태양 빛이 내리쬐는, 새파란 바다에 둥실 떠오른 듯한 원색의 섬. 그 두 가지는 몇 번을 떠올려도 처음과 똑같이 선명하게 내 머리와 몸을 온통 점령한다.(p.14~15)

“여자애를 찾는 거라면 아까 젊은 남자가 저기 종려나무 밑에 파묻고 갔어….”
돌덩이 같은 등이 내뱉은 그 말은 환청처럼 실감이 나지 않고 침묵보다 더 허허로웠습니다.
“종려나무 같은 건 없어요. 저건 능소화잖아요.”
정원 한쪽에 서 있는 나무에 지그시 시선을 던지는 시아버지의 옆얼굴을 사토코 씨는 섬뜩한 듯이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습니다.(p.43)

여태껏 이 집에 똬리를 틀고 있던 뭔가가 시어머니 돌아가신 뒤에 조금씩 조금씩 겉으로 스며 나온 끝에 결국 한 소녀의 죽음이라는 형태로 터져 나온 것이다. 아니, 이번 사건으로 모두 다 토해낸 게 아니다. 이 집이 검은 비닐 봉투에 폭 싸서 감춰둔 쓰레기는 그 사건으로도 미처 다 토해내지 못한 채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지금, 여름 늦더위에 썩어 문드러져 마침내 불쾌한 냄새를 풍기고 있다….(p.81)

나오코의 머리카락이 틀림없다. 유키코 자신의 머리카락을 꼭 닮았기 때문이다. 역시 히라타는 그날 나오코와 어떤 식으로든 만났었다…. 하지만 그래도 히라타는 범인이 아니다. 진짜 범인은 바로 나다. 나는 그날 호텔방에서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 그 집 정원에서 일어난 일들을 모조리 보고 있었다. 능소화나무 뒤편에서 이 그림책의 늑대와 똑같은 표정으로.(p.139~p.140)

자꾸 꽃 넝쿨로 목을 매려다가 나동그라져 죽지 못하고 웃음소리를 올리는 노인을 보고 있으려니 어쩐지 나오코의 죽음까지 그리 슬픈 사건이 아닌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노인의 괴상한 말과 행동을 혼자 감당하면서 사토코는 신경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한, 도무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피로감을 느껴왔지만 왠지 이 순간, 사토코는 처음으로 이 노인네는 미친 게 아니라고 느껴졌다. 오히려 이 노인네만 정상이고, 미친 건 우리 쪽이다. 나를 포함해 죽음을 잔혹하고 슬픈 것으로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미친 것이다….(p.186)

성인이 되면서 유키코는 언니에게 이길 수 있는 것을 딱 한 가지 갖게 되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남자를 충동질하는 몸…. 그녀를 유리라고 한다면 아직 녹아 있는 상태의 뜨겁고 유연한 액체 유리였다. 남자를 갖고 놀듯이 마음껏 꿈틀거리며 형태를 바꾸는 몸. 그 몸을 무기로 유키코는 언니가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했다.(p.225)

“죽여도 좋아”라고 여자는 말한다. “괜찮아, 당신 역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이 아이 역시 고통에서 해방될 테니까. 이 아이는 천사처럼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당신과 또 다른 사람들의 미움을 그 작은 몸으로 미처 다 받아내지 못해 울먹거리고 있어. 그러니까 이 아이도 편해지는 거야…. 모두를 위해서야. 그러니까 괜찮아.”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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