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어느 날의
5교시 국어 시간 같은 이야기들
등단 후 27년 동안 여덟 권의 시집을 출간하며 시를 통해 순수에 대한 동경과 고단한 현실을 살아가는 이웃을 위로해 왔던, 고성만 시인의 첫 산문집이 나왔다. 30여 년 고등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어를 가르쳐 왔던 선생님이 시적 은유와 가르침의 포즈에서 벗어나 오롯이 한 인간으로서의 깊숙한 속내를 드러낸다.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 만한 강렬한 지혜나 영혼에 균열을 낼 정도의 깨달음을 전해주지 않는다. 그는 철저하게 자기 삶에 대한 반성에서 모든 걸 시작한다. 누구나 가지고 있지만 차마 내보일 수 없었던 삶의 상처와 비밀 그리고 항상 뒤늦게 깨닫게 되는 사랑과 성찰을, 비 오는 날의 5교시 국어 시간처럼 솔솔 풀어낸다.
나도 모르는 사이 웃음이 슬몃 새어 나오는 풍경에서부터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장면까지를 지나다 보면 사랑과 그리움, 미안함과 부끄러움, 기쁨과 슬픔 등 삶의 페이지들에 채색된, 이름 붙일 수 없는 마음의 결까지 모두 마주할 수 있다.
고향의 부모님을 떠나 도시로 전학 온 십대 시절에 겪었던 따돌림과 무차별 폭행의 상처, ‘비극’이 ‘축제’처럼 다가왔다던 1980년 5월 광주의 기억, 일남 오녀의 외아들로 대학 시절 민주화 투쟁에 동참하지 못했던 시대적 부채감. 손발이 마비되어 가고 기억마저 희미해져 가는 누나에게 미리 쓰는 이별의 편지, 영문도 모른 채 좌절해야 했던 연애 이야기, 염치없게도 남이 운전하는 차 타기를 좋아하게 된 사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혼자 찾아가는 어머니의 고향 학선리 이야기, 삼십여 년의 교사 생활에 대한 소회 등, 그동안 시 행간 속에 감춰져 있던 자연인 고성만을 고스란히 읽을 수 있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인 세상
한 계단 위쯤에서 바라보는 시선과 지혜
고성만 시인의 제자인 김정희 변호사(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장)는 『다행이다, 내가 더 사랑해서』를 읽고 이렇게 이야기한다.
“시인은 도시에 산 지 40년이 넘었지만 아직 반거충이 도시인, 아직도 고향 변산 어귀에 엉거주춤 서서 하늘빛을 닮은 앞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시내버스 창가로 흐르는 올망졸망한 풍경들을 좋아하고, 헛헛함이 스멀거리면 시외버스 타고 소읍을 구경하고, 일없이 걷다가 극락강 어디쯤에서 잠시 멈추기도 한다. 해 질 녘 시끄럽게 날아오르는 가창오리라도 만나면 더 좋을 것이다. ‘마땅하고 옳은 일’이 무엇인지 오리무중이다. 시인은 어느 모퉁이에서 다시 당신을 물끄러미 바라본다”고.
인생의 길모퉁이에서 시인은 뒤돌아본다. 누님과 함께 태어나서 자란 그 바다, 최락희 씨 댁의 자취방, 시를 노래하던 포장마차, 동네 골목으로, 카페로, 저수지로, 할 일 없이 걸으며 만나는 이들마다 따뜻한 시선과 연민을 던진다. 이 책은 누구에게 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인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이다. 사랑과 행복, 그리움을 원했으나 미음과 연민, 두려움으로 점철된 삶을 되돌아보는 시인은 독자인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는 이 책이 그저 한없이 움츠러들던 안타까운 영혼의 외침이라고 낮춰 말한다. 독자는 오히려 그의 이런 시선에 함께 눈을 맞추고 마음을 얹어 자기의 삶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러는 사이 독자에게는 자신도 모르게 용서의 마음과 지혜가 스며들고, 삶을 한 계단쯤 위에서 바라볼 수 있는 조금 넓고 높은 시야를 갖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