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의적절’ 시리즈를 소개합니다.
시詩의 적절함으로 시의적절時宜適切하게!
제철 음식 대신 제철 책 한 권
난다에서 새로운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열두 명의 시인이 릴레이로 써나가는 열두 권의 책. 매일 한 편, 매달 한 권, 1년 365가지의 이야기. 이름하여 ‘시의적절’입니다. 시인에게 여름은 어떤 뜨거움이고 겨울은 어떤 기꺼움일까요. 시인은 1월 1일을 어찌 다루고 시의 12월 31일은 어떻게 다를까요. 하루도 빠짐없이, 맞춤하여 틀림없이, 매일매일을 시로 써가는 시인들의 일상을 엿봅니다.
시인들에게 저마다 꼭이고 딱인 ‘달’을 하나씩 맡아 자유로이 시 안팎을 놀아달라 부탁했습니다. 하루에 한 편의 글, 그러해서 달마다 서른 편이거나 서른한 편의 글이 쓰였습니다. (달력이 그러해서, 딱 한 달 스물아홉 편의 글 있기는 합니다.) 무엇보다 물론, 새로 쓴 시를 책의 기둥 삼았습니다. 더불어 시가 된 생각, 시로 만난 하루, 시를 향한 연서와 시와의 악전고투로 곁을 둘렀습니다. 요컨대 시집이면서 산문집이기도 합니다. 아무려나 분명한 것 하나, 시인에게 시 없는 하루는 없더라는 거지요.
한 편 한 편 당연 길지 않은 분량이니 1일부터 31일까지, 하루에 한 편씩 가벼이 읽으면 딱이겠다 합니다. 열두 달 따라 읽으면 매일의 시가 책장 가득하겠습니다. 한 해가 시로 빼곡하겠습니다. 일력을 뜯듯 다이어리를 넘기듯 하루씩 읽어 흐르다보면 우리의 시계가 우리의 사계(四季)가 되어 있을 테지요. 그러니 언제 읽어도 좋은 책, 따라 읽으면 더 좋을 책!
제철 음식만 있나, 제철 책도 있지, 그런 마음으로 시작한 기획입니다. 그 이름들 보노라면 달과 시인의 궁합 참으로 적절하다, 때(時)와 시(詩)의 만남 참말로 적절하다, 고개 끄덕이시라 믿습니다. 1월 1일의 일기가, 5월 5일의 시가, 12월 25일의 메모가 아침이면 문 두드리고 밤이면 머리맡 지킬 예정입니다. 그리 보면 이 글들 다 한 통의 편지 아니려나 합니다. 매일매일 시가 보낸 편지 한 통, 내용은 분명 사랑일 테지요.
책 속에서
몰라서 못 본 미욱한 빛이 내 안에도 참 많았는데. 지금은 붙잡고 싶어도 다 떠나고 없다. 언제 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고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시커먼 어둠 속에 손을 욱여넣으면 축축하고 물렁거리는 것만 잡힐 뿐이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평생 살아야 한다.
정말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새까맣게 몰랐다면 그것들이 있다가 없이 된 건 어찌 알았을까.
저기 봐라. 먼 하늘에 내 얼굴 하나 날아간다.
_10월 1일 「예언」, 15~16쪽
그는 아주 사소하고 사악한 거짓말로 아무도 모르게 누군가를 집요하고 고통스럽게 괴롭힐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죽은 사람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전혀 신경쓰지 않는다. 그러니 사실상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쓰지 않는 것이다.
그는 멈추지 않는다. 멈출 수가 없다.
그의 본성이 이토록 악하다는 사실은 오직 신만이 이해하시리라. 이 악취 나는 영혼은 지옥에서 영원히 불타리라.
“기쁨.”
그에게 기쁨을 주고 싶지 않다.
그래서 더 사랑한다.
미칠 듯 사랑한다.
_10월 4일 「그 빛」, 33~34쪽
기억하고 싶지 않아서 오래오래 지운다. 첫 시집에 실린 시 「미래로부터」는 2020년 봄에 초고를 썼다. 그때도 나는 나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는 것들에 대해서만 쓰고 싶었다. 내내 혼자 말하고 혼자 듣던, 저주처럼 염불처럼 줄줄 외는 고백 같은 건 다시 하기 싫다. 그런데 쓰다보면 가족들이 자꾸 시에 나온다. 난 아직 준비가 안 됐는데 자꾸만 튀어나온다. 죽은 사람마저 곧잘 되살아나 나를 망치려고 온다. 고요하고 한적한 성의 풍경. 지우려고 애쓰면 분명 떠오르는 것들. 매일 책상 앞에서 다짐한다. 시에서 가족을 빼자. 집을 빼자. 몸을 빼자. 고통과 슬픔을 빼자. 아직도 피 흘리고 있는 사건들을 빼고 쓰자. 키우던 개와 고양이를 빼자. 유년기를 빼자. 소년기도 빼자. 구체적인 날짜, 지명과, 헛것들도 빼자. 귀신, 유령, 천사, 신, 무당, 모두 빼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빼고, 그래, 계절과 날씨도 빼자. 전부 다 빼고 쓰자. 물론 잘 되지 않는다. 보다시피. 항상 내가 쓴 글이 읽자마자 사라지는 것이었으면 하고 바란다. 과거의 모든 사실과 기억도 꿈결처럼 바람처럼 가벼이 흩어져 사라지면 좋겠다. 그러나 그것들은 오래전 지어진 성벽처럼 언제나 있다.
_10월 11일 「과거로부터」, 74~75쪽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은 무언가에 중독되었거나 중독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한쪽밖에 고를 수 없다. 한번 중독되면 멈출 수 없으며 멈출 수 있다면 중독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라 일찍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자정 전에 집에 들어가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희망이구나, 희망. 중독은 희망이구나.
_10월 12일 「익명의 중독자들」, 100쪽
한동안 여성 시인들의 첫 시집을 찾아 읽었다. 그들의 최근 대표작 대신, 꼭 처음, 첫 시집이어야만 했다. 그 책들을 읽으면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았고, 쓸 수 없었고, 이따금 무엇이든지 쓰고 싶어졌다. 중간이 없었다. 그들처럼 나를 바닥까지 가라앉히고 끝까지 밀어붙이고 싶지만. 나는 이제야, 뻔뻔하게도, 그러나 어설픈 포즈조차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내가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아직 깜깜하지만, 그래도 가고 싶은 곳이 있다.
_10월 29일 「물 한 사발」, 16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