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문단에 데뷔했거나 말았거나, 버젓이 이름 단 책을 출간했거나 말았거나 모두가 '작가님'인 브런치 세상에서 상금도 상패도 없는 문학상을 받은 18명의 작가들이 의기투합해서 [글루미 릴레이]라는 책을 만들어 냈습니다. 앞사람의 글에서 영감을 받아 쓰는 릴레이 형식이었습니다. 우울하고 힘든 세상에 작은 촛불 하나 켜는 주제라 면 시든, 소설이든, 수필이든 마음대로 쓰며 브런치 마당에서 한바탕 즐겁게 놀았더니 이렇게 멋진 책이 한 권 손에 뚝 떨어졌습니다!
책 속에서
우울은 영혼의 감기와 같다. 태어나 한번도 우울을 겪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울을 무조건 극복하라 말하고 싶진 않다. 다만 감기가 걸리면 잠깐 쉬어야 낫는 것처럼 우울이 찾아온다면 우리네 삶도 잠깐 쉬며 내 삶의 전반적인 것들을 리셋 해보는 시간으로 삼아보자.
-p12
우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우물이 분명 있었다고, 우물가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러 마당에 뿌리고, 수박을 꺼내 먹고, 엄마가 빨래를 했던 기억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우물을 없애고, 펌프를 설치한 것 같기도 하고, 수돗가가 된 것도 같다. 확실한 것은 물의 공간이었다는 것. 하늘색 나무 대문도 진짜 하늘색이었는지, 물의 기억이 대문까지 흐르고 이어져 하늘색으로 기억하게 했는지, 내가 푸른 하늘의 자유를 갈망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아무것도 확실한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지금의 내 감정에 따라서 새롭게 변형되고 조율되는 하나의 이미지가 있을 뿐이다.
-p28
긴긴해 여름 저녁 답
찰락찰락 박 바가지 물을 뿌려
빨갛게 익은 마당 열기를 걷어내고
싸륵싸륵 싸리 빗자루 힘찬 비질로
우둘투둘 흙 마당 매끈하게 다듬어
영차영차 기다란 멍석 힘을 합쳐
마당 위에 평평하게 펼쳤다.
사락사락 수수 빗자루 고운 비질로
까끌까끌 보리까락 살뜰히 떼어내고
뽀득뽀득 물걸레질 엉겨 붙은 곡식 분을 말끔히 닦아낸 후
영차영차 커다란 밥상 힘을 합쳐 멍석 위에 그득하게 펼쳤다.
-p35
“그란디 말이여, 가끔 얼굴에 언뜻 그늘이 지나가는 게 보여서 나는 영 그게 맘에 걸려부러. 상처 있는 사람은 서로 알아보는 법이제. 그게 얼매나 깊었는지, 얼매나 나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말여. 은영아, 아가. 죽을 만큼 힘들어도, 죽을 일은 없는 법이여. 시상에는 이겨내지 못할 일도 없는 거고. 내가 그리 살아왔당게.”
-133
대전역에 선 열차의 문이 열렸고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비어있던 통로측 좌석에 중년 여성이 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바깥의 기차 플랫폼 쪽을 바라보았고, 그때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로 채워진 익숙한 풍경이 드러났다. 별 이유 없이 평범한 풍경을 빤히 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때로는 멈춰 서서, 스쳐 지나간 풍경을 떠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순간이든 그 순간만의 풍경은 있는 법이고, 놓친 풍경만큼이나 켜켜이 쌓인 풍경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풍경은 종종 설움도, 아쉬움도, 그리움도 뒤섞인 채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으로 먹먹하게 번졌다. 익숙하고도 오래된 저녁노을처럼.
-169
‘이젠 어떤 불행도 비극도 우리에게 올 수 없다. 내가 모든 걸 삼키고 떠났으니 무결하다. 가장 순결하고 고운 색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번 엔딩은 내가 만든 최초의 시작이자 마지막 엔딩이다.‘
-194
이제야 겨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무엇을 쓸지, 나도 모르겠다.
쓴다고 해서 잘 쓸지도 모르겠다.
진실은 나는 지금 겨우 방바닥에서 일어났다는 것이다.
-p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