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잠실에 있는 123층짜리 건물은 붓 모양이다.
발광하는 붓으로 밤하늘에 무슨 말을 건넸는지
조금은 알고 있다.
주천사
이중현 시인은 ‘시인’이라는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과묵하다. 크게 기뻐하지도 않고, 크게 슬퍼하지도 않는다. 해서 ‘낙이불음(樂而不淫)’, ‘애이불상(哀而不傷)’을 지키며 중용(中庸)의 길을 걸었던 조선 시대 선비의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중현의 시는 인공지능(AI)이 인간의 사고를 대신하는 이 첨단 디지털 세계 속에서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인간 본연으로의 회귀를 꿈꾼다. 기계와 인간이 다른 게 무엇일까? 어디에서는 그것을 ‘추억’이라고 한다. 하지만 시인은 ‘그리움’을 찾아낸다. ‘어머니의 품’과 같은 그리움, 혹은 상실감을 그리기 위해 “꽃과 별로 엮은 그리움의 약도”를 들고 숨어 있는 언어를 찾아 시간 여행을 계속할 것이리라. 그 여행이 끝나면, 길이 열리길!
- 권순긍 (세명대학교 교수, 우리말 교육현장학회 회장)
책 속에서
<시력>
한때 속가슴에서 키우던 신앙생활이 있었다
이적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
오른발이 빠지기 전에
왼발을 내디뎌 물 위를 걷거나
믿음을 한데 모으면 몸이 공중 부양하여
새처럼 하늘에서 인간의 심정을 살피거나
아무에게나 목소리가 세 번만 닿으면
눈이 크게 열려 보이지 않는 것도 보거나
책상 앞이나 자동차 백미러에 걸어 두고
눈앞을 떠나지 못하게 한 말도 있었는데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싹튼다
죽으려 하면 살 수 있다는 참 쉬운 말
그 말에서 우려내어 속가슴 물들인 말
아픔이 쌓일수록 웃음은 단단해진다
미움이 진할수록 사랑도 선명해진다
길을 잃어야 길을 찾는다
처음부터 남몰래 의심하기도 했다
신앙은 믿을 수 없어 신앙이지만
이제 신앙을 떼어내고 생활만 남았는데
이적은 아닐지라도 이변은 생겼다
내가 너무 잘 보이는 것이다
다시 속가슴 깊이 물들이는 말
내가 잘 보이니 그대가 보이지 않는다
<스마트폰 단식>
간헐적 단식 3일째
내 체질에 적합한 16:8 단식법
저녁 8시부터 낮 12시까지 금식
검색창을 단단히 잠갔지만
오늘은 불안해서 전원마저 까맣게 끄고
소파에 누워 세상을 눈감는다
나를 찾는 메시지와 전화벨 소리의 환청
긴급 속보가 펄럭이고
텔레그램 페북이 저마다의 음성으로 간절하다
일어나 거실을 서성이지만
실은 스마트폰 주위를 군침 삼키며 맴돈다
해독 요법으로 한밤중에 시를 음미하는데
시 행간 사이에 시보다 더 맛있는
광고 문구에서 김이 물씬 솟고
가슴 살짝 드러낸 유튜버도 눈짓한다
오늘 밤은 어둠마저 단식해야겠다
나만 홀로 하얗게 남을 때까지
외면할수록 더 질기게 달라붙는
외로움이 나를 멀리 배웅할 때까지
<방화>
늦가을 무렵 어머니가 나를 버린 듯하여
가슴에 무서리가 자랄 때면
동생 데리고 밭일하는 어머니 품을
마당에서 멀리 그리워했다
한 줌 체온이라도 껴안고 싶어
부엌에서 어머니를 불피우다가 집을 태운 그날
방죽에 숨어 가슴 새카맣게 바라본 밤의 하늘
꽃잎 같은 불티들이 반짝였고
마지막 증거인 어머니가 사라진 지금
세상은 왜 아직 어머니들로 가득한지
한여름인데도 수족 냉증이 기승부려
만지는 것마다 겨울이 된다
햇볕이 살지 않는 골목에는 빙판이 자라고
사람들 앞가슴을 걸어 잠그는 된바람
덧셈이 되지 않는 나와 그대의 체온
또 어머니를 불피우고 싶었다
오늘 밤도 하늘엔 그날의 불티가 눈짓한다
방화의 유혹이 비상등처럼 번쩍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