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저, 저것, 저런 것,
나는 나의 체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책 속에서
호수를 기억해 내려는 몸짓
깃털 하나 낡은 오리털 잠바에서 빠져나온다
티피에 올랐더니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있는 목동들이 보인다
새들의 깃털로 장식한 모자를 쓰고 물담배를 피우는
양을 키운 사람이 양을 잡았다고
구루에게 말했더니 하산하라고 한다
양털 모자를 선물로 받은 사람 모자 하나로 따듯해진 사람 세상에 나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가 되었다
드디어 꿈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고
그의 어깨에 깃털 하나가 내려앉는다
첫 강의 주제는 바닥이다
바닥이 없다는 것만큼 무서운 건 없다
무엇보다 믿고 있는 바닥을 의심하라
그의 강연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추락하기 시작했다
하염없이 추락하는 사람들에게 돌팔매로 양들을 모는 사람이 보인다
돌은 양들에게 던지는 게 아니라 양들이 가야 할 곳으로 던져진다
양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은 호수를 심연을 모른다
침묵을 밀고 가는 깃털을 보면
무엇이든 말해 놓고 들키는 느낌이 든다
세상 모든 것들의 가벼움을 이해한다면
우주의 마지막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다
모퉁이에서 모퉁이까지 사선으로 가로질러 갔다가 갔던 길을 돌려 다시 날고 있는 곡선이 보인다
무엇을 어디서 가져왔는지
그것을 어디로 가져가는지
중요한 건 우리 모두 다른 곳에서 온 꼭짓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
한곳에 모이기 위한 방향들
방향이 되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깃털들
실은 추방되는 것이다
한 문장에서 다음 문장이 빠져나온다
--- 「변곡」 중에서
피정 끝난 사람들을 태운 전세 버스가 골목으로 들어선다
퇴근 시간엔 샛길도 막히는 법, 버스가 뒷골목에 끼어 버렸다
얼떨결에 홍등 아래 서 있는 사람들의 포즈를 본다
나체에 가까운 23번과 눈화장 짙은 16번이 눈에 들어온다
겨우 깨끗해졌는데 더럽힐 일 있냐고 누군가 운전수에게 항의한다
나는 정글을 삼킨 홍학이나 생각하기로 한다
삼백육십 도 회전이 가능한 목뼈를 깃털 속에 넣고 자는 동물
골목만 한 습지가 없다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로 생각할 때까지
가방 속에 있는 시집을 언제 꺼내 읽어야 타이밍이 좋을지 망설이는 동안 책도 창녀일까, 생각부터 만지작거린다
생각의 진열도 배치가 중요하다
그래서 눈도 겨울이 길러 내는 작물이라 치자던 시인을 생각한다 민희라는 첫 애인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마지막 소원이라던
책들의 호객 행위
수련은 한 방에 무너졌다
함께 살고 있는 줄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총천연색 어둠
후진이 최선이었다
버스가 찔끔찔끔 움직이는 동안
사흘이 멀다 하고 파출소에 들락거리던 철웅이 오빠가 난데없이 생각났다 가난한 청춘이 피워야 할 말썽 다 피우고 그 경험 삼아 시작한 번개탄 장사로 떼돈 벌어 폭삭 늙은 엄마를 황후처럼 모셨다는 소문은 아직도 훈훈하다
어떤 사색이든 가능한 사시사철
무 싹이나 보리 싹에 내려 쌓이는 눈을 상상하며 본 적 없는 민희와 철웅이를 생각하니 지루한 기분이 좋아진다
자기의 그림자가 애인인 줄 알고 행복해하는 해피 홍학과 정글을 통째로 삼킨 매는 비슷한 구도를 가진 한 작가의 그림이다
나는 두 개의 그림을 가진 테이블 위에 책을 내려놓을 것이다
펴면 앉은뱅이 식탁이고 접으면 액자가 되는 테이블
덕분에 방을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다
버스가 길을 잘못 들어선 건
아무래도 우리가 못 본 것들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나뭇잎이 나를 잎사귀로 생각할 때까지: 롭상도르찌 을지터그스.
--- 「혼선」 중에서
누군가 힘껏 잡아당겨 한없이 길어진 장방형 벽에
그가 붉은 칠을 하고 있다
지우는 일인가
거듭나는 일인가
모든 벽이 문을 향하고 있음을 덧칠은 다시 한번 보여 주고 있다
으깬 잇꽃과 잘 말린 암컷 연지벌레 가루가 담긴 양동이가 그를 따라다닌다
극한상황에서 더 붉어진다는 안료
색은 색을 불러들인다
쉽거나 한가로워 아무것도 아닌 일
붉은색은 더 붉은색으로 조금 더 분명해진다
칼에 찔린 짐승들이 뛰어다닌다 솟구치거나 낭자해진 시간들을 감추기 위해 붓을 휘두르는 그가 까마득한 곳에서 달려오고 있는 비린내를 덮는다
정신이라는 입체, 보지 못한 평면들을 위해
젖은 습자지 같은 오늘을 어제 위에 펼치고 있다
벽이 태어난다
면은 세우는 것이 아니라 펼치는 것
서두르지 않는 의식
따듯한 오후 한때가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칠해야 할 벽이 자꾸만 길어지고 있다
--- 「면의 이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