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병사들 가운데 하나가 애절하게 말하고 있었다. 애처롭게 울부짖는 병사의 목소리는 10여 세에 지나지 않게 매우 앳되었다. 병졸이 모자라니 아무나 끌어다 쓰는 모양이었다. 하기는 나도 아버지 대신 부역에 동원된 일이 있지 않았나. 나는 절박하던 그때의 목소리가 지금까지 기억되고 있다. 야간이지만 비행기 소리에는 공포가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대문에 총기 부딪는 소리인지 뚝딱거리는 소음과 함께 사방이 조용해졌다. 그러나 식구들은 무서워 얼마간 대문을 잠그러 나가지 못했다.
다음 날 낮이었다. 내가 다니던 문터골 간이 학교 앞 신작로에 미군 탱크가 나타났다. 그리고 거기에서 서북방이 될 애기봉 쪽을 향해 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애기봉 강가에는 지난밤의 군들을 태워 갈 것이었는지 목선이 보였다. 직선거리로도 오리가 넘어서일까 확실히 보이지는 않았다.
이때 어디서 정찰기가 나타나 주변을 선회했다. 탱크에서도 지휘관인지 밖으로 몸을 내밀더니 망원경을 보며 교신을 했다. 태극기를 들고 환영하러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그 가운데 끼어 있었다. 조금 뒤 지휘관은 교신을 끝냈는지 사람들을 물러서라는 손짓을 했다. 이어서 탱크의 포신에서는 벼락 치는 굉음과 함께 대포가 몇 번 터졌다. 강기슭에 떨어진 포탄이었는지 하얀 물보라를 일으키는 것도 있었다. 정찰기는 폭파된 목선과 함께 전황을 사진으로 남기려는지 더 가까이 날고 있었다. 얼마 전 봉성리 제방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서로 거리를 맞대어 벌이던 전투를 보던 모습과는 양상이 아주 달랐다.
-50쪽
어머니가 현저동 산 101번지에 무허가 집을 짓기 시작한 뒤였다. 우리 터 바로 앞에 다른 사람이 와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머니 연세의 충청도 출신 내외분이였다. 혼자일 때는 경찰 단속에 크게 겁이 났으나 공범자가 생기니 마음이 좀 놓였다. 뇌물로 파출소 소장에게 묵인은 받았으나 완전하지는 않았다. 파출소 소장이 바뀔 때마다 뒷돈을 내야 될 거라는 말도 있었다. 우리에게는 금품을 제공했다는 증서를 받은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우리에게도 증언을 해 줄 협력자를 만나게 된 것이다.
공범자들이라 그런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두 집은 한 가족처럼 친하게 되었다. 그 집도 두 치짜리 각목 기둥에 ‘타마구’ 기름종이를 덮은 방 두 개였다. 아들 둘에 딸 하나가 있었는데 맏아들은 나와 동갑이었다. 채소 장사를 하는 박 씨 아저씨는 일본에 징용을 갔다 온 분이었다. 필적도 좋고 서생처럼 조용하셨다.
-100쪽
필기도 선생님이 칠판에 쓰지 않고 하나하나 또박또박 불러 주어야 했다. 그래서 맹학교 교실에는 흑판이 없는 경우가 많다. 당시는 전맹이라야 맹인이라고 인정하는 정서가 있었다. 수업이 몇 시간 진행되니 맹학교 교육이라고 일반 학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나는 실감할 수 있었다. 교육 방법이 다를 뿐 그 내용은 거의 일반 학교와 같았다. 그런데 점자가 문제였다.
점자를 쓰는 것은 쉽게 익혔으나 읽기가 안 되었다. 산소 용접을 할 때 손가락 끝에 여러 차례 화상을 입어 감각이 몹시 둔했다.
종이에 찍힌 점자가 하나하나 구별이 어려웠다. 굳은살을 벗기면 감각이 예민해질까 손가락을 시멘트 바닥에 갈았으나 그것은 더 미련스러운 행동이었다. 오히려 상처의 고통과 함께 시간만 더 걸리게 만들었다.
맹학교에서는 방학 외에는 기숙사에 학생들을 모두 수용하며 숙식을 제공하고 있었다. 현재는 형편들이 좋아져 숙사가 호텔 못지않게 되었어도 집에서 통학하는 학생이 있다. 하지만 지방에서 상경한 사람과 아울러 그때는 재학생은 거의 입사를 했었다.
재정이 좋지 않을 때라 식사는 김치 깍두기와 콩나물 아니면 된장국이 전부였다. 분교 초기에는 수도도 없어 샘물을 길어 썼다
고 한다. 내가 입사했을 때도 식당과 세탁실 말고는 수도가 없었다. 기숙생들은 교문 밖 우물에서 용수를 길어다 써야 했다. 실생 인원도 방의 크기에 따라 5~7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내게는 연탄 난방의 숙사가 호텔처럼 안락하게 느껴졌다. 새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으니까.
-150쪽
서대문 성당에 나가 기도도 했다. 그러나 강북 인구 분산 정책에 의해 강남이라야 안마 시술소 허가가 나왔다. 나는 노량진 삼거리시장 근처로 이사했다. 그리고 제명원 안마 시술소란 업소를 보건소에서 허가를 받았다. 욕탕과 침실을 갖추고 전광등 간판을 단 호화로운 안마 시술소가 아니었다. 침과 안마 치료를 할 수 있는 방 하나만 있었다. 그러나 이 역시 찾는 환자가 많아지니 고발이 들어갔다. 손으로 하는 수기 요법만 허용이 되었고 침은 불법이었다. 그렇지만 치료 효과를 높이려면 침을 함께 사용해야 했다. 그사이 아들 하나가 더 생겼는데 애들 앞에서 수갑을 찰 지경이 되었다.
욕탕을 갖춘 안마 시술소에서 자격증을 빌리면 명예 원장으로 대우한다고 접근해 왔으나 나는 퇴폐업이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그즈음 문세광의 육 여사님 총격 사건이 있었다. 나는 내 가족을 잃은 것처럼 슬펐다. 육영수 여사님은 내게 진정한 국모님이셨다. 다른 시각장애인들 가운데도 나와 같은 감정을 지닌 사람이 많은 것 같았다. 동작동 여사님 묘를 찾아뵙자고 했다. 안내를 받겠지만 ‘깜깜이’들의 단체 참배는 흔치 않은 일일 것 같았다. 시각장애인 연합회 회장은 이 사실을 해외에까지 알릴 방법이 없는지 생각해 보자고 했다. 여사님은 장애인들의 정립회관을 세우는 데도 역할이 크신 것으로 알려졌었다. 나는 천일이가 형이 통신사 기자가 되었다고 한 것을 기억했다. 통신사에 기사가 되려면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된다고 알려져 있었다.
-199쪽
일행들은 밤이 깊어지자 여독에 코 고는 소리만 요란했다. 처음 당하는 일었다. 몇 시나 되었을까 화장실에서 마주치는 사람이 생겼다. 나는 병원이 급하게 되었다고 낮은 소리로 말했다. 소란으로 여행의 분위기를 망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은 이 고장 사람으로, 가까운 병원은 10시가 지나야 될 거라고 했다. 한 시간도 어려운데 10시간이나 기다려야 한다니. 나는 소변을 못 보면 요독증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한 요독증은 시각과 청각을 마비시키고 중풍에까지 이르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게 답답할 수가 있을까? 앞이 보인다면 병원이 100리 밖에 있다 해도 뛰어나가겠지만 어떻게 하겠는가? 비상용으로 휴대용 침 갑을 항상 지니고 다녔지만 그날따라 준비가 없었던 것도 후회되었다.
이토록 막막한데 그대로 있자니 시간도 더욱 느리고 고통도 가중되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일을 생각해 내야 되었다.
그러다가 신장과 방광의 긴장을 줄일 목적으로 제자리걸음을 하며 배와 허리를 쓰다듬고 두드리는 ‘쓰두’를 한 시가 좀 지나서부터 이어 갔다. 이것이 무슨 효험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지루함은 덜어 주었다. 마침 일행이 타고 온 차를 이용할 수 있었다. 타관이라 다른 차를 부르자면 비용이나 시간에서 한층 어려웠을 것이다. 병원에서는 바쁜 시간이라 그런지 몇 마디 물어보고 호수로 오줌만 빼 주었다.
88올림픽을 준비할 시기였다. 국제 올림픽 관계자들이 우리나라 전통 스포츠마사지를 보여 달라고 했단다.
-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