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는 안전이 게임의 명칭이다. 안전은 게임의 주된 목적이며 최고의 판돈이다. 안전은 이론상으로는 아니지만 사실상으로는 여타의 모든 가치를 왜소하게 만들고, 주목과 관심의 대상으로부터 배제한다. 지금처럼 불안한 세상에서 개인적인 말과 행동의 자유, 사생활의 권리, 진실에 대한 접근권은 삭감되거나 유예될 필요가 있다.
1부 _ 〈2장_ 위험사회〉 중에서
2022년 7월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도 글로벌 재난시대에는 인류의 선택이 ‘공동 대응 아니면 집단자살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말하며 전 세계인의 연대와 협력을 간절히 호소했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의 기대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코로나19 글로벌 감염병이 확산하는 동안 각 국가는 연대와 협력 대신에 오히려 봉쇄와 각자도생의 전략을 선택했다.
… 글로벌 시대에 환경파괴는 환경문제로 그치지 않고 세계평화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 이런 배경에서 독일의 환경장관을 역임했던 클라우스 퇴퍼(K. Toeffer)는 “환경정책은 곧 평화정책이다”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1부 _ 〈3장_ 글로벌 재난사회〉 중에서
사회학자 셰리 터클(S. Turkle)은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제기되는 인간의 정체성에 관련하여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기술이 미래에 어떤 모습일까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어떤 모습일까, 우리와 기계의 관계가 점점 더 긴밀해질수록 우리가 어떤 모습이 돼갈까에 관한 것”이라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 4차 산업혁명 사회에서는 인간의 기술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기술에 대한 인간의 통제가 불가능해진다. 그동안 기술은 실용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인간의 수단이나 도구로서 인간의 통제 영역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소유’ 상태였던 기술이 이제는 일종의 ‘행위와 과정’이 되어가고 있다. … 혁신기술이 불러올 이런 윤리 문제들을 간파한 한스 요나스(H. Jonas)는 기술사회에서 고려해야 할 도덕적 책임의 성격을 이미 벌어진 사태에 대한 ‘사후 보상에서 사전 예방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2부 _ 〈1장_ 4차 산업혁명과 기술윤리〉 중에서
위험과 재난사회에서 중요한 공적 가치인 공공의 안전을 지키려면 ‘내가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만이 아니라 ‘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자각도 필요하다. 실제로 우리는 코로나19 글로벌 감염병 사태에서 자신의 편의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인해 사태가 얼마나 악화되었는지 목격했다. 비록 작고 사소한 개인적인 부주의라도 얼마든지 이웃과 사회공동체를 위험이나 재난에 빠트릴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안전만 생각하는 ‘사적 시민의식’에서 공공의 안전을 지키겠다는 ‘공적 시민의식’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말하자면 ‘개별적 나’를 ‘보편적 나’로 확장해야 한다. 이를 신앙적 관점으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기독교인의 정체성을 ‘기독 신자’이면서 동시에 ‘기독 시민’으로 확장해야 한다.
2부 _ 〈2장_ 위험사회의 직업(인)윤리〉 중에서
타인의 고통조차 감성적으로 소비되는 이미지 과잉 시대에 타자의 고통에 제대로 공감하려면 고통을 불러온 구조적 원인을 잊게 만드는 감상적 연민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려면 교회가 구성원의 연민과 공감의 정서를 길러주는 교육에 힘쓰면서도 고통의 원인이 되는 사회구조적인 악의 현실과도 투쟁해야 한다.
2부 _ 〈3장_ 글로벌 재난시대를 위한 지구윤리〉 중에서
기술 유토피아에 대한 환호는 기술이 인간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맹목적 믿음, 곧 기술만능주의를 낳는다. 반면에 기술 디스토피아의 공포는 기술로 인해 인류가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묵시록적 공포를 낳는다. 전자의 믿음이 ‘기술 우상화’의 태도라면, 후자의 믿음은 ‘기술 악마화’의 태도다. 하지만 홍성욱도 지적했듯이, 특정한 기술이 특정한 궤적을 그리도록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결정론적 태도는 잘못이다. 왜냐하면 기술혁신이란 그것이 열어주고 힘을 부여하는 사회세력과 그것 때문에 힘을 잃게 되는 사회세력들 사이의 상호작용 가운데 불확실한 상태로 형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사회가 혁신기술을 수용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그 기술을 발전시킬지를 결정하는 것은 운명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선택의 문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기술을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윤리적 검증과 책임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3부 _ 〈1장_ 산업문명과 기술에 대한 신학적 무관심과 무지〉 중에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요 의미요법(logotherapy)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V. Frankl)은 인간을 가리켜 ‘의미를 찾는 존재’라고 규정했다. 그에게 신정론 이해의 열쇠는 고통 속에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고통의 의미를 발견하도록 돕는 데 있다. 구약성서 욥 이야기는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해 정직하게 항변하면서 그 의미를 찾아내려 애쓰는 욥 같은 사람이 무작정 하나님을 변호하려는 그의 친구들보다 더 하나님을 잘 체험하고, 영적으로도 더 성장한다고 본다(욥 42:5-6). 토마스 롱(T. Long)도 인정했듯이, 고통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항변하는 질문은 ‘신앙의 부재’라기보다는 차라리 ‘신앙의 표현’으로 이해함이 옳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께 항변하는 사람들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기보다는 그들을 지지하고, 격려하고, 동행해 주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일이야말로 재난시대에 적절한 목회 돌봄이다.
3부 _ 〈3장_ 고통의 신학과 돌봄 및 치유 목회〉 중에서
“오늘날 세계에 만연한 가난의 진짜 원인이 인간의 탐욕이지 자연의 부족함이 아니”라고 말했던 헨리 조지(H. George)의 통찰이나, 지금 세상의 결핍과 고통은 “지구의 무능력한 생산력 때문이 아니라 나눌 줄 모르는 인간의 무능함 때문이라”는 호프 자런의 지적은 매우 타당하게 들린다. 나눔의 행위는 우리가 탐욕을 물리침으로써 진정으로 풍성하게 살면서 구원을 현실적으로 경험하게 돕는 좋은 삶을 살아가는 대표적인 방식이다. 성서의 샬롬 비전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런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서 현대 소비주의 사회에 맞서 살아가는 용기가 필요하다.
3부 _ 〈4장_ 샬롬, 오래된 미래의 꿈과 비전〉 중에서
저자가 기독교사회윤리의 과제를 ‘희망과 책임의 매개’라고 주장한 이유는 희망이 기독교사회윤리의 동기와 동력이라면, 책임은 기독교사회윤리의 구체적 사회전략과 프로그램에 관련되기 때문이다. 신학적 모티브인 희망과 윤리적 모티브인 책임은 선택적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이다. 특별히 희망이라는 모티브는 이 책의 주제였던 위험과 재난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 낸 종말적 사회 분위기에 적절한 모티브다.
… 저자가 이 책에서 기독교사회윤리의 신학적 토대로 삼았던 종말 혹은 희망이란 모티브는 모든 종류의 사회 이슈 논의에 적용될 수 없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사회 이슈의 특성에 따라 신학적 모티브나 토대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마땅히 달라져야 한다.
〈맺음말 _ 희망과 책임의 매개로서 기독교사회윤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