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seed, 마음에 피어나는 봄〉
“봄 방이 추우면 맏사위 달아난다.” “봄바람에 죽은 노인” “봄바람에 여우가 눈물 흘린다.”
꽃샘추위에 얽힌 속담들만 보아도, 예나 지금이나 봄바람이 얼마나 추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봄의 시샘도 지쳤는지 오늘은 소리도 없이 온종일 비가 내렸다. 봄비는 짙게 깔린 황사와 남은 겨울의 찬 기운을 씻어내며, 대지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3월, 봄은 약동의 씨앗이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봄은 다시 태어날 채비를 하고, 비를 머금은 땅은 이제 싹을 틔울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적당히 젖은 흙은 모종을 옮겨심기에도 알맞은 자리를 내어준다. 봄은 내 안으로도 스며들어 굳었던 몸을 풀어주고 잠들어 있는 영혼을 흔들어 깨운다.
어릴 적, 대청마루 찬장 안에는 봉지마다 제각각의 향기와 맛을 지닌 씨앗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 속엔 부모님의 땀방울과 지나간 계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녹두에는 아이들 속을 달래던 약효가, 붉은 팥에는 액운을 막아내는 믿음이, 하얀 콩에는 고소한 생명의 맛이 깃들어 있었다.
선비잡이콩이라 불리던 그 작고 단단한 콩에는, 부모님이 자식들에게 걸던 조용한 소망이 숨어 있었다. 그밖에도 찰기장, 고추, 배추, 골파, 대파 씨앗도 빼곡히 걸려 있었다. 부모님은 그 씨앗들을 보물처럼 소중히 다루셨다. 씨앗은 단순히 곡식의 시작이 아니었다. 고향의 역사였고, 부모 세대의 이야기가 깃든 서사였다. 한 톨의 종자가 한 되가 되고, 한 말이 되고, 마침내 한 가마니가 되기까지,
그 생명이 깨어나는 순간, 농부의 기다림은 결실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내 기억 속 가장 깊은 맛은 가을 옥수수였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이면 어머니는 콩밭 머리에 옥수수를 심으셨다. 바람이 불면 콩잎은 살랑살랑 흔들렸고, 그 곁에서 옥수수는 묵묵히 키를 키웠다.
초록 잎새 사이로 수줍게 고개를 내밀던 분홍빛 옥수수수염은 햇살을 받으며 보석처럼 반짝였다. 그 수염이 왜 그렇게 아름다웠을까. 아마도, 오랜 기다림이 깃들어 있어서였을 것이다. 나는 설렘을 품고 옥수수밭을 드나들었다. 맨살에 스치는 거친 잎사귀조차도 향긋하게 느껴졌다. 수염이 갈색으로 변할 즈음, 기다림은 더욱 간절해졌고, 추석 무렵이 되어서야 비로소 속이 꽉 찬 삶은 옥수수를 입에 넣을 수 있었다.
그 맛은 마치 밀크 캔디처럼 달콤하고 깊고 부드러웠다.
지금은 그 맛을 느끼고 싶어 많은 지역의 옥수수를 먹어 보지만, 그 맛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 토종 씨앗은 이미 세월 속으로 사라진 것 같다. 씨앗은 사는 것이 아니라, 이어받는 것이라 했다.
농부는 단순히 농사를 짓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을 이어 심는 일이다. 씨앗은 단지 식물을 키우는 출발점이 아니라, 기억과 손길과 계절이 켜켜이 쌓인 시간의 결정체다. 땅과 사람, 그리고 세월이 함께 엮어낸 유산이다.
사람의 마음도 씨앗과 닮았다. 마음속에 무엇을 심느냐에 따라 삶의 풍경도 달라진다. 살다 보면 기쁨도, 상처도, 질투와 분노 같은 감정도 마음속에 흘러든다. 그 모든 감정을 품고 살아가야 하지만, 그중 어떤 감정의 싹을 틔울지는 결국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
마음에 심는 씨앗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자라고,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누군가에게 건넨 따뜻한 말 한마디, 양보의 손짓, 조용한 미소 하나가 씨앗이 되어 마음 한편에 자리 잡는다. 그 뿌리는 언젠가 행동이 되어, 또 다른 마음으로 전해진다. 반면, 미움이나 오해도 씨앗이 된다. 무심코 방치한 나쁜 감정은 어느새 마음 한구석을 까맣게 물들인다. 그래서 마음을 자주 들여다보아야 한다. 잡초는 뽑고, 내가 진심으로 심고 싶은 감정만 남겨 두어야 한다.
사람의 말도 씨앗이다.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마음에 깊숙이 박혀, 오래도록 뿌리를 내리기도 한다. 따뜻한 말은 희망을, 날 선 말은 상처를 키운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넬 때, 생각하게 된다. 이 말이 어떤 꽃이 되어 그 사람의 마음에 피어날지 아니면, 차가운 벽에 부딪혀 부서진 채 사라질까 하는 망설임에 저절로 말수가 적어질 때가 있다.
누군가를 판단하기 전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는 마음,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아도 언젠가 열매 맺을 것을 믿고 기다릴 줄 아는 여유를 갖고자 노력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자라는 씨앗도 있다. 용서의 씨앗, 기다림의 씨앗, 믿음의 씨앗이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눈빛이나 걸음걸이, 혹은 침묵 속에서도 자라난 흔적으로 남는다. 이것은 마치 오래된 나무의 나이테처럼 조용히 자란다.
내 마음 밭에 ‘이해’와 ‘믿음’의 씨앗을 심는다. 이 두 씨앗이 있다면, 마음에도 꽃이 피고,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어줄 수 있을 것 같다.
오늘도, 이 밭에 햇볕을 드리고, 촉촉이 물을 주며 들여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