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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독서 후기 : 반복 연습 | 정기현
저자 소개
저자 : 폴 오스터 (Paul Auster)
현대 미국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이자 에세이스트, 시인, 번역가, 시나리오 작가. 1947 년 미국 뉴저지주의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 『뉴욕 3부작』으로 문단의 주목을 받으며 실종과 우연, 반복과 고독을 축으로 한 독창적인 서사를 구축했다. 도회적 감수성과 정제된 문체, 우연의 연쇄를 탐색하는 내러티브 장치로 ‘현대의 보르헤스’라 불리며, 사실주의와 형이상학적 상상력을 결합한 작품들로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달의 궁전』 『우연의 음악』 『폐허의 도시』 『거대한 괴물』 등에서 운명과 정체성의 테마를 탐색해온 그는, 2000년대 들어 『환상의 책』과 『어둠 속의 남자』를 통해 상실 이후 삶을 이야기로 감당하는 방식과, 고통을 픽션으로 다루는 데 따르는 책임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탐색했다.
그의 작품들은 4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모턴 도언 제이블상, 펜/포크너상, 메디치 해외 문학상, 아스투리아스 왕자상 등을 수상했다. 2006년에는 미국 예술문학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브루클린 풍자극』 『신탁의 밤』 『동행』 『공중 곡예사』 『스퀴즈 플레이』 등의 소설 외에도, 에세이 『빵 굽는 타자기』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시나리오 『마틴 프로스트의 내면의 삶』 『다리 위의 룰루』 등을 집필했다. 또한 자크 뒤팽, 장폴 사르트르, 스테판 말라르메 등의 작품을 영어로 옮긴 번역가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편소설 『바움가트너』를 투병 중 집필한 뒤, 2024년 4월 30일 향년 77세로 세상을 떠났다.

역자 : 민승남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제15회 유영번역상을 수상했다. 옮긴 책으로 E. M.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 앤드루 솔로몬의 『한낮의 우울』,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 메리 올리버의 『기러기』,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의 『별의 시간』, 윌리엄 트레버의 『마지막 이야기들』, 폴 오스터의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공역), 시그리드 누네즈의 『그해 봄의 불확실성』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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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모든 것을 잃은 남자와 모든 것을 버린 남자
인생이라는 환상에 토대를 둔 두 남자의 끈질긴 추격

상실, 우연,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그려낸
폴 오스터 문학 세계의 정점

현대 미국문학의 거장
폴 오스터 Paul Auster

폴 오스터를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 새로운 번역
‘환상과 어둠’ 컬렉션

섬세한 문체와 탁월한 구성, 날카로운 현실 감각과 철학적 깊이를 바탕으로 현대 미국문학의 독보적인 거장으로 자리매김한 작가, 폴 오스터의 장편소설 《환상의 책》 개정판이 ‘환상과 어둠’ 컬렉션으로 북다에서 출간되었다.

1970년대 후반 문단에 등장한 오스터는 일찍이 ‘미국문학의 미래를 대표할 작가’라는 평가를 받으며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반세기 동안 소설과 산문, 시나리오와 번역까지 폭넓게 활동하며 문학의 경계를 넓혀왔다. 작가는 현실의 세밀한 질감을 포착하는 동시에 환상적 요소를 절묘하게 결합해, 인간이 겪는 상실과 고독, 애도의 문제를 집요하게 탐구했다. 《뉴욕 3부작》은 메타픽션적 서사의 전범으로 불리며 새로운 장르적 전통을 열었고, 《달의 궁전》은 세대와 역사를 교차시킨 성장 서사로 평가받았으며, 《공중 곡예사》는 우연과 부조리를 통해 인간의 운명을 비추는 오스터 문학의 면모를 드러냈다. 또 《빵 굽는 타자기》 《낯선 사람에게 말 걸기》 등의 산문집에서는 개인적 체험과 시대적 맥락을 교차시키며 소설가를 넘어선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었다. 2017년에는 장편소설 《4 3 2 1》을 발표하며 작가 인생의 정점을 찍은 대서사시라는 찬사를 받았다.

‘환상과 어둠’ 컬렉션은 폴 오스터 문학의 정수를 압축해 보여주는 《환상의 책》과 《어둠 속의 남자》로 구성되어 있다. 새로운 번역 작업은 물론 현재 한국 문단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두 소설가 정기현, 김화진의 독서 후기를 함께 실어 오늘의 독자에게 오스터의 세계를 다시 읽는 새로운 시선을 제공한다. 두 작품은 “인간은 왜 이야기에 기대어 살아가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여전히 불안과 상실로 흔들리는 현재의 삶에 깊은 울림을 전한다.

모든 것을 잃은 남자와 모든 것을 버린 남자
인생이라는 환상에 토대를 둔 두 남자의 끈질긴 추격

“책이 해낼 수 있는 궁극적인 역할의 영역”_정기현 소설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들을 비행기 사고로 잃고 삶의 의욕마저 상실한 대학교수 ‘데이비드 짐머’. 우연히 TV에서 본 ‘헥터 만’이라는 배우의 코미디 연기는 슬픔과 무기력에 빠져 술로 하루하루를 버티던 그의 삶을 바꾼다.

시작부터 끝까지 몇 초도 지속되지 못한 웃음이었다. 그 웃음 자체는 특별히 요란하거나 지속적이진 않았지만 기습적으로 찾아왔고, 나는 그것에 굳이 저항하지 않았으며, 헥터 만이 스크린에 등장한 몇 장면이 이어지는 동안 나의 불행을 잊은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았다. (……) 내가 웃을 수 있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건 완전한 마비 상태는 아니라는 의미였다. 내가 세상과 담을 쌓고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다는 거였다. (21쪽)

긴 절망 끝에 있던 데이비드는 사고 이후 처음으로 웃는다. 그 웃음은 한 인간이 자신의 무너진 삶을 회복하고 되찾으려는 불씨가 되었다. 헥터는 무성영화 황금기인 1920년대에 단 1년간 활동하며 코미디 단편 열두 편을 남기고 돌연 사라진 배우이자 감독이었다. 데이비드는 곧 헥터의 전작(全作)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세계 곳곳의 영화 보관소와 아카이브를 뒤지며 그의 영화들을 찾아 감상하고, 헥터의 희미한 흔적을 더듬으며 마침내 헥터의 영화에 대한 연구서 《헥터 만의 무성 세계》를 집필한다.

1988년에 책을 출간한 데이비드는 자신을 헥터의 아내라고 소개한 ‘프리다 스펠링’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는다. 편지 내용은 실로 충격이었다. 모두가 죽었을 것이라 예상했던 헥터가 살아 있으며, 데이비드를 만나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데이비드는 곧장 답장을 보내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오지 않아 편지를 잊으려 한다. 그러던 와중에 ‘앨머 그런드’라는 여성이 데이비드를 찾아온다.

“나는 꾸며내는 짓 안 해요. 나도 직접 거기 가지 않았더라면 믿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에요. 모든 것이 헥터가 말한 그대로였죠. 그가 나에게 거짓말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그의 말이 진실이었다는 게 밝혀졌어요. 데이비드, 그의 이야기가 도저히 말이 안 되는 건 바로 그것 때문이에요. 그가 나에게 진실을 말했다는 것.” (314쪽)

앨머는 프리다가 보낸 편지가 진실이며, 불의의 사고로 답신을 보내지 못한 사정을 설명한다. 데이비드를 설득한 앨머는 헥터가 있는 뉴멕시코로 그를 이끈다. 뉴멕시코로 향하는 길에 데이비드는 앨머에게서 헥터의 지난 세월에 대해 듣는다. 헥터가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는 커다란 비밀이 숨어 있었다. 은둔의 세월 동안 헥터가 감당해야 했던 고통은 단순히 세상으로부터 사라진 한 예술가의 비극이 아니었다. 그것은 창작의 열망과 자기 파괴의 충동이 부딪치는 내적 갈등이었고, 과거의 잘못 앞에서 끝내 벗어날 수 없었던 죄와 속죄의 무게였다. 그러한 헥터의 삶은 가족을 잃은 뒤 상실 속에 무너져 있던 데이비드의 모습과도 겹쳐졌다.

“우리는 모두 불가능한 일들을 믿고 싶어 한다.”

상실, 우연, 허구와 현실의 경계
폴 오스터 문학 세계의 정점

이번 개정판에는 소설가 정기현의 독서 후기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정기현은 《환상의 책》을 두고, 이야기가 결국 삶 자체와 겹쳐지며 상실의 순간을 반복해 견뎌내게 하는 힘을 보여준다고 평한다. 짐머와 헥터, 앨머와 프리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책을 덮은 뒤 남는 것은 복잡한 서사가 아니라 단순하고도 간명한 깨달음이며, “책이 해낼 수 있는 궁극적인 역할의 영역”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강조한다.

《환상의 책》은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우연의 충돌, 사랑하는 이를 잃은 뒤 남겨진 깊은 상실의 감각, 그리고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이야기의 힘을 한데 모아 그려낸 작품이다. 그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이야기야말로 인간이 상실을 견디고 삶을 이어가게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의 원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사람의 기억과 다른 한 사람의 애도가 겹쳐 탄생한 ‘환상의 책’은, 이야기야말로 상실의 절망을 견디고 삶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임을 증명한다.

옮긴이의 말

비행기 추락사고로 사랑하는 아내와 어린 두 아들을 잃은 남자, 삶과 세상을 견딜 수 없어서 숲속 작은 집에 은둔한 채 서서히 죽어가던 그에게 기습적으로 웃음이 찾아온다. 우연히 TV에서 옛날 무성영화의 코미디 연기를 보다가 잠시나마 자신의 불행을 잊고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절망과 무의미의 바다에서 익사하던 그는 지푸라기라도 잡듯 자신을 웃게 만들어준 코미디 배우에게 매달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 여정에서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는다. 《환상의 책》은 비극과 고통, 환상(예술이라는 형식을 빌려 기적과도 같은 위력을 발하는), 구원에 대한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이야기이며 삶의 가시밭길에서 무수히 상처받은 우리의 영혼을 치유의 손길로 어루만져주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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