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순수와 진실이 만나다
― 이영숙의 수필 세계
수필도 나름 특징이 강하다. 문학의 주류인 시나 소설이 아니라는 것이 첫째 이유다. 물론 평론이나 희곡도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다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이 두 번째 이유다. 세 번째는 누구나 쓸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학성 있는 수필은 결코 쉽게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시는 짧고 소설은 긴 데 비해 수필은 그 중간이라는 것도 특징이다. 시는 숨기는 것이고 소설은 제3자를 통해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면, 수필은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주도적으로 쓴다는 것이다.
여기서 특징을 살린다는 것은 장르의 구분을 확실하게 하지만 갈수록 서로 틀어지고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결합하는 가운데 장르의 경계가 모호해 지고 있다. 산문시가 유행처럼 퍼져나가고 희곡체 수필도 오래전에 나왔다. 장르 해체, 이도 옛말이 되었다. 퓨전 수필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어떤 틀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가두면, 다시 말해 자유를 속박하면 어려움을 겪게 된다. 수필 이론을 보면 그런 틀이 많아 의아스럽기까지 하다.
수필은 쓰는 의도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기체로 쓸 수도 있고 서간체로도 쓸 수 있다. 이렇게 확장 시켜나가면 시체詩體, 소설체 등도 나오게 된다. 그렇다면 시의 특징인 상상도 과감하게 가미할 수 있고 소설의 특징인 대화체를 빌려 전 편을 쓸 수도 있다. 이러한 파격적인 수필 쓰기는 현대 수필에 있어서 핵심적인 요소가 된다. 이를 살려 나가야 한다는 것도 고상한 수필의 한계에서 벗어나는 다양한 시대에 부응하는 일이 된다.
현실이, 생각이 상상 이상으로 바뀌는 첨단 과학 세계에서 수필은 제자리걸음만 할 수 없다. 아니다. 이제 다른 장르보다 앞서 다양한 세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수필이 선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일들은 도처에 가득하다.
부담 없이 현대인들에게 다가서기 좋다는 수필의 장점도 살려야 한다. 시처럼 어렵지 않고 이 바쁜 시대에 소설처럼 긴 글을 읽는 부담도 없다. 그러한 시대적 요청에 맞춰 다양한 시도와 새로운 소재와 문학성 있는 수필 세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 또한 자연스럽게 스며들 듯 일어나야 하는 일이다. 수필의 특징은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러한 전제는 오래 수필을 쓰고 한 권의 수필집을 만드는 이영숙 수필가의 작품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수필집 속에는 한 사람의 우주가, 한 생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 사상이나 철학, 사랑과 이별 등등이 어떠한 형태로 이야기되고 풀어나가고 의미 부여가 되고 있는가를 따져 나가는 것은 그래서 진중한 일이 된다. 이를 세세히 이야기하려면 상당한 시간과 지면이 필요하여 몇 가지로 크게 특징을 잡아 이영숙 수필가의 면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야기 곁에서
시를 뺀 나머지 장르는 다 산문이다. 그래서 수필과 소설은 서로 다르지만 산문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야기를 쓴다는 점이 유사하다. 수필 속에서 제3자 이야기가 나오면 깜박 짧은 소설 읽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이러한 소설체 수필의 진수를 이영숙 수필가는 자주 보여주고 있다. 소재와 이야기가 문체와 잘 맞아 만들어낸 결과이다.
입추가 지나자 무덥던 날씨가 조금 시원해졌다. 저녁이 되면 공원을 산책한다. 배롱나무 주위를 돌며 사진을 찍고 그 앞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아서 예쁜 꽃을 바라보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꽃말은 헤어진 벗에게 보내는 마음이다. 갑자기 심장이 벌렁거리며 한 여인이 생각난다. 내가 새댁 때 만나 2년여 한집에 살던 여인이다. 부안으로 발령받은 남편을 따라 이사 간 우리는 전세를 살게 되었다. 그곳에서 같이 세를 사는 예쁜 여자를 만났다.
그녀도 아들이 있었다. 방 앞에 선인장을 종류별로 많이 키웠는데 그것을 구경하다 사귀게 되어 친구처럼 지내게 되었다.
― 배롱나무 에서
배롱나무꽃을 보며 떠오른 그녀가 주인공이다. 2년여를 같이 살았던, 아들이 있었던 예쁜 그녀 이야기가 어떤 사연으로 펼쳐질 것인지 관심을 끌고 있다. 첫인상이 깊게 느껴지는 부분이다.
주인집은 뜰이 넓었다. 뒤뜰에는 앵두나무를 비롯해 여러 과일나무가 있고, 앞마당에는 키가 크고 굵은 목백일홍이 우뚝 서 있었다. 우리는 배롱나무 아래서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는 것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 남편은 나이가 많고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다. 출장 간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무언가 석연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대놓고 묻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모른척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만 나누었다. 살림도 깔끔하게 잘하고 음식 솜씨도 좋았다.
― 배롱나무 에서
그녀의 특징을 간단명료하게 잡아놓고 남편 이야기로 예사롭지 않은 사연을 전개 시키며 궁금증을 유발하고 있다. 이는 구성의 문제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풀어내는데 유용한 일이다. 이영숙 수필가는 이러한 세련된 구성 방법으로 독자를 글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그날도 배롱나무꽃이 활짝 피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노부인이 기웃기웃 대문을 들여다봤다. 누구를 찾는 것 같더니 마당에서 뛰어놀던 아이를 보고 달려가 껴안고 울었다. 한참을 울던 노부인은 놀라서 쳐다보는 그녀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덩달아 놀라서 얼른 아들을 안고 방으로 들어왔다. 궁금하지만 엿들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애만 태웠다.
몇 시간이 지났다. 기척 없이 조용하더니 노 부인이 조용히 나와 대문을 나섰다. 배웅하는 그녀 눈이 울었는지 뻘겋게 충혈되었다.
― 배롱나무 에서
노 부인과 그녀와 아이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 사실이 픽션 보다 더 절절한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수필이 소설보다 더 진한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소설체 수필의 진수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수필의 장점을 살려 소설적 특징을 끌어들인 결과이다.
배롱나무꽃은 점점 더 붉게 물들어갔다. 주인집 아주머니가 배롱나무 밑으로 나를 불렀다.
“이제야 하는 말인데….”
아주머니는 누가 들을까 겁나는 듯 조심하면서 말했다.
그녀의 남편은 원래 결혼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이가 없어서 따로 여기에 살림을 차렸단다.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얻은 남자는 신이 나서 먼저 부인과 이혼하려고 했지만 완고한 어머니는 조강지처는 내쫓는 게 아니라면서 아기를 데리고 오면 키우겠다고 하더란다. 지난번 노부인이 온 것도 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노부인이 자네는 젊으니 아기를 주고 새 삶을 살도록 하라며 돈을 두둑이 줬다고 한다.
“절대로 아기를 못 준다고 했다는데….”
아주머니가 안타까운 듯 말을 흐렸다.
배롱나무꽃은 지고 있는데 친정에 간다던 그녀는 백일이 지나도 오지를 않았다. 며칠 지나 집에 온 그녀의 남편은 아기와 엄마가 없는 걸 알고 그길로 뛰쳐나갔다.
― 배롱나무 에서
소재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다음 어떠한 글로 형태를 만들 것인가는 중요하다. 배롱나무는 여기서 엑스트라지만 차마 꺼내기 힘든 붉은 사연을 전해주는 메시지 강한 존재로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 있을 또 다른 붉은 사연들을 유추해보게 한다. 시대가 바뀌어도 사람 살아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사연들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생기고 또 사라지고 있다. 이를 놓치지 않고 끌어당기는 힘이 이영숙 수필가에게 있다는 것도 확인하게 된다.
상상 곁에서
문학의 나라에서 상상은 최고의 권좌에 앉아 있다. 그런데 유독 수필의 나라에서는 그 명성만큼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수필이 사실적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특징 때문이지만 사실에 기반을 둔 상상은 얼마든지 사용 가능한 일이다. 상상이 없어 오히려 수필이 딱딱하고 삭막한 느낌이 든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아니다. 상상은 사실적 요소를 윤택하게 하며 여유까지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초현실까지는 아니라도 상상을 통해 사실이 안고 있는 한계도 극복하고 문학성도 확보할 수 있다. 글은 생각을 쓰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쾌하면서도 달콤한 로봇 새소리에 J 씨는 눈을 떴다. 피곤이 가시지 않아 삼십 분 정도 더 잘까 하다가 오늘이 어머니 생신이라는 것이 생각나 벌떡 일어났다. 이미 생신 선물로 달나라에 육박 칠일을 패키지로 보내 드렸지만 98세 되는 날을 혼자 보내게 둘 수는 없었다.
― 中略
벨을 누르니 똘똘이가 쟁반에 뜨거운 물수건이랑 양치할 물을 가지고 온다. 오늘따라 발걸음이 시원치 않다. 똘똘이 녀석, 업데이트할 때가 되었나 보다. 아침은 간단하게 알약으로 부탁하고 뉴스를 본다.
― 中略
이번에는 종합 비타민이 들어있는 귀걸이를 사 가리라 마음먹는다. 귀걸이처럼 끼고 있으면 자동으로 비타민이 투입된다.
― 中略
어머니는 아직도 J 씨가 어린애로 보인다. 만날 때마다 자가 비행기 운전 조심해라, 불조심하라며 잔소리한다. 냉장고 단추를 눌러 자동으로 깎은 과일을 내놓고 먹으라고 성화를 부린다. 그럴 때마다 J 씨는 어린아이가 되어 어리광 섞인 미소를 날리며 과일을 먹는다.
― 中略
아침 건강 체크를 위해 J 씨는 닥터를 부른다. 컴퓨터에 연결하기만 하면 로봇이 온몸을 진찰하고 처방을 내준다. 이는 아직 성성하며 혈압도 정상으로 조절되고 있고 당뇨는 위험수위에 있으나 약만 꾸준히 먹으면 좋아진다고 말한다. ‘좋아요.’ J 씨는 혼자 중얼거리며 옷을 입는다.
― 2045년의 어느 봄날 에서
20년 후를 상상하며 쓴 마치 공상과학 소설 같은 수필이다. 여기서 상상과 소설이 극적으로 만나는 장면을 살펴보게 된다. 상상은 무한대다. 그 세계를 마음껏 날아다니도록 신神은 인간에게 특혜를 주었다. 이 은총을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현실성이 없다고 등한시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단순하게 생각할 수 없는 부분들이 상상 속에는 충분히 들어 있다.
일차, 지금 우리 살아가는 현실과 20년 후의 상상이 비유되는 모습이 새롭고 신기하다. 달나라로 여행을 가거나 자가 비행기를 타고 다닌다는 가상은 현실로 다가올지 모른다. 때로 모른다는 말이 가지고 있는 매력을 곱씹어 보게 된다.
이차, 재미가 있다. 상상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이를 즐기는 것은 현실의 팍팍한 현실에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해준다. 상상도 못하고 현실에 발목 잡힌 채 허덕이며 살아가야만 하는가. 수필도 그래야 하는가,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영숙 수필가는 이미 알고 있다. 상상의 세계에서 상상 이상의 이야기와 의미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기실 20년이 문제가 아니라 30년, 50년, 100년 뒤를 헤아려 보고 있다는 것도 은근 숨기고 있다. 그런 매력을 슬쩍 꺼내 보여주고 있다.
손님 곁에서
정현종 시인은 방문객이라는 시에서 한 사람이 찾아오는 것은 한 사람의 일생이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글 쓰는 사람에게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각별한 인연이 된다. 그 사람들의 일생을 찬찬히 살펴보면 그 안에 숨겨진 사연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누군들 한 가지 아픔과 한恨이 없을 것인가.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은 내 말보다는 남의 말을 많이 들어야 한다는 공식이 나온다. 비록 그 사람이 진상을 떨더라도 말이다.
우리 교회에는 걸인들이 많이 온다. 한 사람, 두 사람, 셋, 넷.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돈을 달라고 한다. 사무원이 정신이 없어 일을 못 하자 일주일에 한 번 주겠다고 공표했다. 정해준 목요일이면 열 명 정도의 손님들이 와서 아침부터 줄을 선다. 여기 온 사람들은 이곳에서 돈을 받고는 재빨리 또 다른 교회로 이동한다.
그중에 한 사람인 그는 키도 크고 허우대도 멀쩡하다. 넉살인지 사교성인지 인사성도 밝다. 줄을 서 있다가도 교인이 들어서면 넙죽 인사를 하고 활짝 웃는다. 주일이 되면 교회 식당에 와서 식판을 들고 서 있고, 밥을 다 먹고도 돌아가지 않고 있다가 식당 청소 때 의자를 올려놓거나 걸레질을 도와준다. 반찬이 남으면 싸주는 걸 기다리기도 한다.
― 진상 손님 에서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도 멀쩡하게 생긴 사람이 자기 힘으로 살아갈 생각은 없이 남의 도움만 바란다면 분명 진상이다. 그런 사람에게 손님이라고 불러 주는 이영숙 수필가의 마음이 먼저 읽힌다. 단순히 흉보려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탕에 사랑과 관심이 깔려 있다. 이는 이번 수필집 전편에 은은하게 깔려 있다.
교회를 다 짓고 이사를 와서 여러 가지 행사로 바쁘게 지내던 어느 날이다. 일층에 커피자판기가 있고 교인들이 차를 마시며 대화하라고 의자를 놓았다. 본 것 같기도 하고, 처음 같기도 한 어떤 사람이 앉아 우리를 보고 씩 웃는다. 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것으로 봐서 새로 등록한 교인인가 싶었다. 씩 웃는 얼굴을 본 순간 몇 년 전까지 우리 교회를 드나들던 그 진상 손님인 것을 알게 되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았냐고 물었더니
“커피 한잔 빼 주면 말할게요.”
하며 뻐기듯 한다.
달달한 커피 한잔에 행복해하며 그가 말하기를 코로나 때문에 집에 다녀왔다고 한다. 놀라움에 집이 있었냐고 물으니 집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한다.
문제는 그의 방랑벽이었다. 옷도 멀쩡하게 챙겨 입고 말끔하게 면도까지 하니 얼핏 신사 같기도 하다. 답답해서 죽을뻔했다는 말로 가족관계와 사는 곳을 어물쩍 넘긴다.
― 진상 손님 에서
커피까지 얻어 마시는 유들유들한 진상 손님은 이미 교인들이 착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믿고 와서 신세 져도 된다는 것도. 이 각박한 세상에 웃으며 가족처럼 맞이해 주는 곳이 많지 않다는 것도. 이영숙 수필가의 소재는 이렇게 발길 닿는 곳에서 다양하게 만나는 사람들을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단순 만남으로 끝나지 않고 작품의 주인공으로 당당하게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심성이 문장 속에서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의미도 이야기 속에 녹여져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
웃음 곁에서
글은 읽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 그다음에 구성이고 묘사고 의미가 따라붙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독백이 될 가능성이 크다. 소재에 따라 다르지만 수필이 꼭 고고하거나 고상한 느낌만 강조할 일이 아니다. 같은 값이면 표현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따져봐야 한다. 평소에도 유머러스한 이영숙 수필가의 모습을 떠올리면 재미있는 글이 나온 이유도 알게 되고 그 느낌도 배가 된다.
나는 양발산이 어디 있는지 의아했지만 가자는 사람이 안내하겠지 하고 등산복을 차려입고 등산화도 신고 스틱까지 들고는 약속 장소에 나갔다. 그런데 이 후배는 양장에 구두까지 신고 나온 것이 아닌가. 이상한 마음으로 다가갔더니 내 차림을 보고 말했다.
“아니 온종일 나랑 놀자고 했더니 또 다른 곳에 갈 차림을 하고 오셨네.”
나는 놀라서 물었다.
“산에 가자며? 양발산.”
그 후배가 갑자기 배꼽을 잡고 웃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 웃긴다. 양발산이라 했더니 산 이름인 줄 아셨나 봐요. 양발산은 산 이름이 아니라 음식점 이름이에요. 음식점. 점심이나 같이 먹고 모처럼 수다나 실컷 늘어놓으려고 했지요. 아하하하.”
‘에고, 양발산이라는 음식점 이름을 들어나 봤나, 와 보기를 했나. ‘산’ 자가 뒤에 들어가 있기에 산인 줄 알았지.’
나는 속으로 툴툴거렸지만, 후배는 온종일 웃고 또 웃으며 재미있어했다.
― 웃기는 사람 에서
다소 엉뚱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먼저 다가온다. 갈수록 잘나고 영악스러운 사람들로 넘쳐나는 세상에 순수함을 찾기란 쉽지 않다. 거기에 너나없이 고학력에 정보도 넘쳐나는 시대가 아닌가. 그때 조금 방심하거나 세류에 크게 관심이 없으면 금방 옛날 사람으로 취급받기 쉽다.
그런데 반대로 그런 순수한 사람이 그리워지는 시대이다. 맹구 이야기나 최불암 시리즈 같은 유머가 한때 인기를 차지했던 이유이다. 그러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는 것이 인용이다. 현대 수필에서 인용을 과감하게 선보이며 그에 못지않은 이영숙 수필가의 이야기도 또 최불암 시리즈 못지않게 재미있다는 것이 대구 현상으로 나타나 있다.
또 하나는 정말 나를 무식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라 말하기 싫은데, 독자들을 재미있게 만들어 주기 위해 소개한다.
몇 년 전 친구들이 모여서 점심을 먹고 한담을 나누다가 일어서면서
“나 아놀드 파마에 가는 데 같이 갈 사람.”
하기에 나는 무심코 대답했다.
“난 며칠 전에 파마했어. 안 갈래.”
그랬더니 친구들이 배꼽을 잡고 웃는다. 알고 봤더니 아놀드 파마는 미용실이 아니고 유명한 브랜드라나 뭐라나.
― 웃기는 사람 에서
이 이야기를 읽고 독자는 그냥 웃기만 해도 된다. 크게 의미 부여하지 않고 시원한 웃음 한바탕 쏟아낸다면 그것이 의미이고 진솔한 의도이고 서슴없는 고백이기도 하다. 이영숙 수필가가 들려주는 사실 이야기가 오히려 더 큰 수필의 요소인 고백의 문학임을 확실하게 입증한 것이다.
작은 녀석이 얼른 ‘고생 끝에 낙이 온다’하니 큰 녀석이 ‘고생 끝에 병이 온다’하고 받아친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하면 ‘젊어서 고생은 늙어서 신경통이다’라고 한다.
어디서 그런 것을 들었냐고 물으니 요즘 애들이 다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일명 신세대 속담이라나. 재미있어서 또 해보라고 하였다. ‘예술은 지루하고 인생은 아쉽다. 윗물이 맑으면 세수하기 좋다. 아는 길은 곧장 가라. 못 올라갈 나무는 사다리 놓고 가라.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죽지 않으면 산다. 서당 개 삼 년이면 보신탕 감이다. 버스 지나가면 택시 타고 가라.’ 줄줄 잘도 외워 말한다.
― 버스 지나가면 택시 타고 에서
이영숙 수필가는 아들만 두 명이 있는데 손주 두 명도 남자다. 이미 손주 이야기는 수필로 여러 편 썼다. 내리사랑이 어디로 가겠는가. 꿀 뚝뚝 떨어지는 이야기 속에 행복한 노후생활이 읽혀진다.
손주들과 신세대 속담을 즐기는 일도 행복의 연장선이다. 고정관념을 깨트리는 것이 글 쓰는 사람들의 운명이라 손주들과 속담 놀이를 하면서도 그대로 수필 한 편이 나왔다.
한참을 떠들다 녀석들은 잠이 들고 나는 신세대 속담이라는 것을 다시 생각해 본다. 설득력 있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중에서도 머리에 남는 속담이 하나 있다. ‘버스 지나가면 택시 타고 가라.’이다. 맞는 말이다. 버스 지나갔는데 손을 든들 무슨 소용이 있나. 발만 동동 구르지 말고 머리를 써야지.
― 中略
청춘을 다 바치며 직장에 충실했지만 정년이라는 제도는 이런 남편도 밀어냈다. 한동안 허탈한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이제 자신의 노후를 충실하게 가꿀 시간이라며 이것저것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고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중국어도 배운다고 신청하더니 휴대폰 다루기도 신청하여 열심히 배우고 있다.
좋아하는 책도 많이 읽고 글을 써보겠다고 컴 앞에 껌 붙인 듯 앉아 있더니 시 공모전에 입선하여 자신감을 얻었는지 행복해한다. 젊음을 태운 버스가 지나갔다고 발만 동동 구르는 것이 아니라 택시를 타고 가고 싶은 목적지에 꼭 도달하겠다고 입을 꽉 다문다.
― 버스 지나가면 택시 타고 에서
이번엔 남편 이야기와 속담을 연결시킨다. 포기가 아니라 새로운 도전이다. 정신까지 노쇠해질 필요가 없다. 도전으로 얻는 충족감은 건강과도 직결되는 문제이다. 쓸데없는 말장난 같은 신세대 속담에서 찾아낸 보석 같은 비유가 반짝인다.
나에게도 구미 당기는 신세대 속담이 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사다리 놓고 올라가라.’
어렸을 적부터 시 쓰기를 좋아했다. 책도 읽고 친구들과 대화도 하면서 문학소녀라는 꿈을 키웠다. 세월은 흐르고 생활인으로 직장 다니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시와는 단절하며 살았다. 중년이 되어 나를 찾아보자고 사진 동아리에 들어가 여행하며 사진 전시회도 하면서 취미를 키우던 중에 지금 문학반을 알게 되었다. 정신이 번쩍 나고 삶의 활력소가 되며 다시 희망이 생겼다.
감히 어디를 올라가! 하며 큰 문학의 나무를 올려다만 보던 마음에 사다리가 생겼다. 문예창작반 시인 선생님과 문우들. 아름답고 건실한 나무들이 손잡아 주어 나는 떨리는 다리지만 사다리를 꽉 잡고 한발 한발 올라간다.
저 높은 곳을 향하여!
― 버스 지나가면 택시 타고 에서
옛 속담에서는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지만 현대에는 사다리 놓고 올라가도 되고 고층까지 올라갈 수 있는 더 좋은 기계들이 즐비한 세상이다. 물론 속담은 비유이지만 한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도 사실이다. 상상이 현실이 되고 상상도 못한 일들이 눈앞에 나타나고 있다.
이제 삶의 질과 멋과 맛을 따지는 시대이다. 이영숙 수필가는 문학소녀 시절에 꿈꾸던 일을 수필가로 거듭나며 본격적인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들의 소망인 수필집도 만들게 되었다.
단순한 수필이 아니라, 기존 속담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 변화에 능동적으로 앞장서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세대 속담을 활용하여 시대에 맞는 의미를 창출하고 있다. 이제 그 어떤 대상도 문학적으로 이해하고 글의 소재로 끌어당겨 작품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한 것이다.
끝에 ‘저 높은 곳을 향하여!’는 이영숙 수필가를 든든하게 뒷받침해주는 하나님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라는 뜻으로 읽힌다.
하나님 곁에서
이번 수필집 곳곳에서 발견되는 이영숙 수필가의 믿음은 믿음직하다. 하나님 가운데서 모든 일이 벌어지고 이뤄지며 감사함을 느끼고 살아간다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욕심과 불의와 절망에서 베품과 정의와 희망을 찾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운 시절을 보낸 이영숙 수필가의 마음속 깊이 자리한 하나님은 든든한 반려자요, 어려운 인생길을 함께 걷는 동반자이다. 모든 일에 힘이 되어주는 하나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사람과 관계는 물론이고 반려견 사랑과 노루귀의 귀함과 다육이에게 쏟는 정성은 이영숙 수필가의 인간적인 면면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있다. 그 뒤에서 빙그레 웃으며 편들어 주며 마음까지 어루만져 주는 하나님도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과용하지 않고 적절하게 문학성을 지켜가며 절제를 하고 있다.
항상 어머니 생신 때쯤 벚꽃이 피었는데 요즘은 계절이 빨라졌다. 이미 벚꽃은 지고 영산홍이 활짝 피었다.
과학이 나날이 좋아진다지만 천기는 사람도 과학도 어찌할 수가 없다. 그건 오직 당신의 뜻이니 자비를 바랄 수밖에 없음을 알고 겸허히 머리를 숙인다.
백 년 전이나 백 년 후나 여전히 계시는 그분에게.
― 2045년의 어느 봄날 에서
내 영혼도 그렇다. 겸손히 낮아질 때라야 십자가가 보이는 것이다. 욕심을 버리고 교만을 버리고 자랑을 버렸을 때, 옆에 계시는 주님이 보이고 마음 중심에 모실 수가 있다. 낮아짐의 표상이신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애쓸 때 교우들의 사랑도 보인다.
병든 자를 긍휼히 보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엎드릴 때 이웃의 아픔과 어려운 이들의 눈물이 보인다. 온몸을 낮추고 두 팔을 벌릴 때 주님의 인자한 손길이 내 온몸을 어루만지시는 것이다.
낮아지면 보이는 것, 온전한 주님의 사랑이다. 맑고 작은 이슬방울을 찍으며 얻은 소중한 생각이다.
― 낮아지면 보이는 것 에서
문학 작품에서 보여주는 가장 큰 감동의 원천은 진실 제시 기능이다. 기교라든지 수사적 장치라든지 하는 외적으로 보여주는 모습보다 내적으로 진실의 넓이와 깊이가 확보되었을 때 많은 사람에게 감동이라는 순금의 결과를 전할 수 있다. 이영숙 수필가가 가지고 있는 이 순수한 진실은 앞으로 창작 활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이유가 되며 가장 강력한 힘으로 작용할 것이다.
아까부터 하늘에서 이영숙 수필가에게 보내는 뜨거운 격려 박수가 들려오고 있었다.
배준석
시인 문학이후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