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오창렬 시인의 시집 『그러니까 나는 지금 사랑하는 사람일까요』를 앞에 두고 나는 ‘나’와 ‘사랑하는 사람’ 사이의 부조리함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사랑하는 사람’은 ‘나 자신에게는 영원히 이방인’이자, ‘나’의 정체성을 서술해 줄 수 있는 존재다. 이방인을 향한 의식은 ‘나’에게 몸이 있다는 감각만큼이나 명징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방인의 시선을 의식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시선의 탐색적 대상인 ‘나’는 때때로 경건해지거나 왜소해지기도 한다. 언제 어디에서든, ‘나’를 향한 이방인의 시선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는 것. 그렇다면 이방인으로서의 자기 응시 윤리가 오창렬 시인의 시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점심도 한참 지났는데 가슴 한구석이 몽글거린다
누르면 천 원이 기부된다는 버튼 앞에서
마음을 내려다 거두었던 아침 일이 잊히지 않는다
줄기에 박힌 옹이를 본 적 있다
꽃을 피우고 싶던 꿈과
이파리도 피우지 못한 절망이
함부로 뭉개진 상처를 본 적 있다
봄나무가 마음을 보내는 가지마다
노랑으로 분홍으로 또 연두로 세상 푸지게 흐드러지는데
버튼 너머로 흘러가지 못한 마음이 휘돌다
내 가슴 한구석에서 소용돌이쳤던가
흐르는 마음 젖이 되고 꿀도 되어
꽃송이 송이마다 향기도 마알간 봄날
나는 겨우 옹이를 위무하던 목수의 대패질을 떠올렸다
몽글거리던 후회를 어루만져 무늬가 될 무렵
저녁이 와서 헐렁한 내 삶을 조이는 옹이를 꿈꾸었다
― 「옹이」 전문
이 시에서 “누르면 천 원이 기부된다는 버튼 앞에” 놓였던 ‘나’와 그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는 ‘나’는 부조리한 관계를 형성한다. 부조리함의 발견은 “점심도 한참 지났는데 가슴 한구석이 몽글거”리는 자기 응시를 통해 이루어지고, 그럴 때 이상하게도 기부 버튼 앞에서 “마음을 내려다 거두었던 아침 일”은 스스로에게 낯선 상황으로 다가온다. 아침의 ‘나’는 점심 무렵이 되면 벌써 이방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절연의 순간을 견딜 수 있는 것은 이 부조리한 상황과 맞서는 우리의 상상적 화해 의지인데, 그러한 의지를 실현하는 활동이 예술이라는 건 앞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러니까 시적 창조의 순간은 자기 절연의 부조리를 발견함으로써 발생한다는 것.
오창렬 시인은 이 지점에서 서정시의 규율을 소환한다. ‘나’에게 주어진 부조리한 사태로부터 “줄기에 박힌 옹이” 쪽으로 시선을 옮겨 디딤으로써 객관적 상황을 만들어낸 것. 이 같은 비유적 상상력을 통해 ‘나’는 부조리와 일정한 거리를 만들어내는데, 그것은 부조리에 매몰되지 않으려는 ‘나’의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다. 이제 시는 ‘나’로부터 ‘옹이’로 전환된다. 오창렬 시인에 따르면 ‘옹이’는 “꿈”과 “절망”이 “함부로 뭉개진 상처”다. 그 상처는 시의 막바지에 이르러 “몽글거리던 후회를 어루만져 무늬”가 되고, 그러한 무늬로부터 “헐렁한 내 삶을 조이는 옹이를 꿈꾸”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렇듯 ‘나’의 사태를 ‘옹이’의 사태로 전환하고, 최종적으로 두 사태의 변증법적 통합으로 마무리하는 서정시의 규율은 ‘나’로부터 절연된 존재의 부조리를 해소하려는 상상적 실천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 문신(시인·문학평론가)
시인의 산문
나에게 시는 막걸리다. 격조했다 싶으면 금단증세처럼 와서 나를 우울/불안하게 하다가도 막걸리 앞에만 가면 부푸는 기운은 시에 대한 설렘/보람과 같다. 그러나 숙취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의 아픔은 공들인 글에서 마주하던 당혹/절망을 닮았으니 나는 수만 번 술과 시를 끊고 매달리며 오늘에 이른 셈이다. 미인 역시 내 영혼에 자주 파문을 일으켰으나 미성 때 이미 ‘난 여자보다 술이 좋다’고 선언했었으니, 가히 유(類)가 같다 하기 어렵다.
은유가 아니라 실제로 시와 막걸리는 같은 무렵 내 어깨를 결었다. 교복 입은 학생 때의 일이다.
시인의 말
나의 시는 굳이 제 땅을 찾지 않는 뿌리가 되어 고단한 산객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으나, 미덥지 못했다면 나의 시는 차라리 땅속에 묻혀 거름이나 되어라.
한 줌 거름이라면 새순을 키울 수 있을 터, 느른한 등이 와서 기댈 줄기도 오긴 올 것이다.
2025년 9월
오창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