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심사 경위
백지은 평론가는 2007년 《세계의 문학》 평론 부문에서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학평론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목하면서 그 모순에 침묵하지 않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누구보다도 예민한 시선을 공유하고자 하는 그는 『독자시점』, 『건너는 걸음』 등의 평론집을 통해 우리 시대 문학의 의미를 탐색하는 비평적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는 평론가이다. 평론에세이로 이름 붙인 『그때 그 말들』은 이같은 그의 비평적 감수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번 수상작으로 결정된 평문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는 김화진의 소설집 『나주에 대하여』를 ‘마음’에 주목하면서 상세하게 분석하고 있는 글이다. 여기에서 백지은은 ‘마음’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사람들 사이에서는 실체적인 무엇인가를 주고받는 것이 가능하게 만드는 일종의 ‘매체’로 보고 있다. 이같은 수많은 마음들이 상호 연결되고 조절되면서 펼쳐지는 세계의 모습으로서 김화진 소설 작품의 특이성을 분석하면서, 결국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관계망에 사회적 구성물인 동시에 개인적 자율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마음’을 겹쳐두고 있다. 이는 사회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의 비평적 감수성을 다시 한 번 명확하게 보여준다. 나아가 그의 비평적 관점은 소설 구성적 원리에 대한 새로운 관점과 함께 사회적 억압이 내면화되는 현실 속에서 소설읽기를 통한 자율성이라는 의미로 나아간다는 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그의 비평적 행보와 평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비평적 성과는 우리 문학의 가치를 보다 확산시키는 한편, 평단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며 이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했다. 2025년에도 한국문학평론가협회는 좋은 작품을 선정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백지은 평론가에게 축하를 드린다. 그가 보여준 비평 작업이 이번 수상을 계기로 더욱 의미있는 세계를 구축해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책 속에서
그런데 이 ‘마음대로’ 사는 것이야말로 좀 보편적인 일인 것 같다. 누구나 마음대로 살 수 있다. 인생이 내 마음대로 흘러간다는 뜻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내 마음을 움직이고 지키고 달래고 키우면서 내 인생으로 끌고 간다는 뜻이다. 인간을 능가하는 어떤 생물에도 기계에도 시스템에도 이 마음만큼은 깃들 수 없음을 근거로 여전히 인간 종의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면 우리는 다만 ‘마음대로’ 살아야만 하는지도 모른다. 마음이 인간이라는 종의 진화를 위해 특별히 창조주가 내려주신 은총이라서가 아니다. 제 마음대로 자기 경험을 설계해 온 인간은 마음을 제 속에 가둔 게 아니라 제 바깥의 개체, 환경, 사물 등에 의탁하고 확장하여 더 멀리, 더 복잡하게 연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인간의 머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또 다른 지능과 함께 처리하며 살아 보려는 쪽으로 진화의 방향이 잡힌 듯도 하다. 다만 아직 그 지능에는, 피가 돌고 숨이 차는 몸을 먼저 계산하는 생존 본능이 없으니, 오늘도 우리는 마음대로 살면 될 일이다.
- 「마음대로 사는 사람아」(백지은) 중에서, 본문 20쪽
시가 되는 순간들은 무엇이며, 우리는 시를 읽고 무엇을 느끼며 시로부터 무엇을 배우는가?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으로서 ‘시적 경이’라는 개념을 제안해본다. 시적 경이는 아메드가 제시한 ‘경이’라는 개념에서 착안한 것으로, 그에 따르면 ‘경이’란 주체가 어떤 대상을 마치 처음 조우하는 것과 같은 감정을 의미한다.8 나는 ‘경이’가 시를 통한 미적 체험을 설명해줄 수 있는 개념이자 인식론적, 윤리적, 미적 차원에 두루 걸친 의미와 역량을 지닌 감정이라고 본다. 구체적으로 이하에서 살펴볼 신이인, 한연희, 임유영의 시는 그러한 체험적 역량을 발휘할뿐더러 경이라는 개념을 정교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시적 경이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공회전하는 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틀 가능성을 보여주는 개념이자, 지구상의 거주 가능성이 위협당하는 동시대 현실에서 세계와 세계 내 인간·비인간 타자들과의 관계를 재건하는 데 필요한 감정적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경이의 세계, 시라는 경이」(김보경) 중에서, 본문 28쪽
라캉의 주체가 ‘충족된 욕구와 불충족된 욕망’의 상태라면, 백은선의 시에서는 반대로 ‘불충족된 욕구와 충족된 욕망’의 상황에 주체가 놓여 있다. 라캉의 아이는 원하던 귤을 받았으나 이것이 사랑의 표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면, 「숨은 귤 찾기」의 이선은 원하던 귤은 받지 못했으나 확고한 사랑을 받았다. 내가 원하는 것을 주지는 않지만 혹은 내가 원한 적 없는 것을 주지만, 분명한 사랑으로써 그렇게 하는 모성은 이 과잉된 사랑-희생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령 독립한 자녀에게 1인 가구로서는 도저히 감당 불가능한 분량의 반찬을 떠안기는 낯익은 엄마의 모습은 분명 자녀에 대한 엄마의 사랑을 압축하는 한 장면이지만, 엄마 자신에 대한 엄마의 사랑이 포착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엄마의 음식은 가족을 먹임으로써 스스로의 쓸모를 재확인하는 주체화 작용의 일환인 까닭이다. 그러므로 「숨은 귤 찾기」에서 아침이 되어 눈을 뜬 이선이 심장(즉, 엄마의 사랑)을 의연히 거부하고 다시 귤을 찾을 때 ‘희생적 모성애의 주체’로의 승인을 거부당한 시의 화자는 기어이 상처받을 것이다.
- 「너를 먹이는 것이 나의 존재 방식  ̄ 돌봄의 숭고함과 모성 정체성의 결탁」(박다솜) 중에서, 본문 62-63쪽
캐서린 헤일스는 현실에 기초하는 전통적 소설과 달리 가상의 시공간에 기초하는 SF문학의 서사를 ‘정보 내러티브’라고 부른 바 있다. 이때 정보 내러티브는 물질적 시공간이 아니라 신체와 사이버스페이스 사이에서 정보를 교환하는 ‘패턴’이 곧 서사를 이룬다. 헤일스의 독창적 주장은 정보와 접촉하고 수용하며 이해하는 패턴 자체가 곧 우리의 신체를 인식하는 방식을 재구성한다는 것이다. 기술 문명이 발전한 시대에 “패턴은 현존을 압도하”는 것이다. 느슨하게, 이원의 시는 SF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SF시는 SF소설처럼 정보 내러티브를 서사화하는 장르는 아니다. 그러나 SF시는 정보 내러티브의 본질적인 ‘패턴’을 형상화한다. 이원의 시는 신성성이 파괴된 신체, 정보를 받아들이는 ‘주유구’로 전락한 신체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절망적 정동으로 주조된 신체적 패턴을 그려낸다고 할 수 있다.
- 「SF시란 무엇인가」(박동억) 중에서, 본문 83쪽
그러므로 광장에 대한 논의에서 보다 구체화되어야 하는 지점은 아무도 배제하지 않는 광장이란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엄밀히 말해 광장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광장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은 맞지만 이는 모두의 뜻을 하나로 모으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각자의 배타적 이익을 공적으로 드러내 경합하고 갈등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광장은 단 하나의 광장이 아니라 매번 다른 맥락을 통해 영원히 유동하며 갈라지는 무수한 광장‘들’을 향해 열려 있다. 정치 공학상 건전한 광장이란 각자의 이익에 ‘눈먼 자’들의 광장이며 그들의 사적인 이익이 의식화되고 사회화될 수 있는, 즉 그들의 이익의 경중이나 상하관계를 따지는 세간의 가치판단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열린 공간인 것이다.
- 「문학의 (이중의) 정치 ― 문학의 민주주의에서 문학의 공화주의로」(이은지) 중에서, 본문 113쪽
매력은 대상의 영향력에 종속되는 것이고, 아름다움은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조화이다. 즉 매력과 아름다움의 분리는 대상과 주체의 근대적 분리와 맞물려 있다. 마찬가지로 계몽은 대상에의 의존이나 종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유로운 주체를 전제한다. 또 주체의 자유로운 능력들 사이의 ‘일치’, 즉 미적 공통감각은 지적 공통감각과 도덕적 공통감각의 근거이다. “능력들 간의 규정되지 않은 자유로운 일치는 다른 모든 일치의 근거이자 조건이다. 달리 말해서 미적 공통감각은 다른 모든 공통감각의 근거이자 조건인 것이다.”
- 「매력의 두 문제 ― 매력의 경제와 감성적 배움」(이희우) 중에서, 본문 129쪽
불안정성을 강요받는 노동자의 삶이 분열, 고립된 채 죽음에 노출되어 있고, 노동하는 신체와 정신의 변형과 기형화가 광범위하게 확산되는 이상 징후를 문학이 포착하고 있다면 그 구체적 양상을 살피는 일은 비평에 주어진 최소한의 역할일 것이다. 이 글에서 살펴볼 최세라의 『콜센터 유감』(도서출판b, 2022), 김사이의 『가난은 유지되어야 한다』(아시아, 2023)는 불안정 노동이 초래하는 분절된 삶의 감각과 신체의 변화에 대한 기록이자 신자유주의적 차별과 불평등이 파괴하는 삶에 대한 증언이다. 특히 여성 노동자의 발화가 두드러진 두 시집은 가이 스탠딩이 말한 바처럼 불안정 임금노동에 진입하는 여성의 증가가 프레카리아트 시대의 특징적 경향으로 나타나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 「부서진 신체들이 우리 앞에 떠오를 때 ― 최세라, 김사이의 노동시에 대하여」(장은영) 중에서, 본문 159쪽
채굴주의란 자본주의적 환경이 전 지구적 수요에 부응해 자연과 자원을 가속화된 방식으로 추출하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성장과 산업혁명에 따라 추출해야 할 자원이 다양해지면서 채굴은 여러 의미에 적용되고, 그에 얽매인 권력과 자본의 문제 또한 더욱 복잡해진다. 또한 채굴은 실제 자원의 고갈뿐만 아니라 가상의 자원을 태워 자연이 다른 방식으로 존재할 가능성마저 파괴하는 잠재적인 위협 또한 포함한다. 간략하게 정리해본다면 ①석유, 광물, 토양, 금속, 동·식물 등 자연의 제한 없는 추출, ②제국주의의 식민화와 인간 노동의 노예화, ③AI 학습을 위한 데이터 추출 및 비트코인 채굴, ④플랫폼 노동, 비물질 노동의 팽창과 초국가적 돌봄 채굴주의, ⑤테라포밍과 우주 자원 개발 욕망을 채굴주의의 예로 들 수 있다.
- 「막과 틈의 야생 ― 젠더화된 채굴주의와 사물의 시간」(전청림) 중에서, 본문 189-190쪽
세월호참사 당일 선내에 방송되었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주체들의 직무유기와 무능해서 악하기까지 한 행정편의주의로부터 태어났으며,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해야 하는 국가와 시스템이 붕괴하였음을 증명한 문장이다. 이 시는 바로 그 문장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울분이나 좌절 혹은 작위적인 풍자의 뉘앙스조차 좀처럼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라는 말을 지독하게 반복한다. 심지어 유머가 가미된 문체로 ‘가만히’라는 말을 되풀이하고 변주함으로써 ‘가만히’의 의미를 자동반사적으로 연결되는 부정성의 맥락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고자 한다. 이러한 말하기는 ‘가만히 있으라’라는 말을 단순히 탈정치화하려는 시도일까? 그것만은 아니다. 이 시의 반복적 말하기는 권력 주체에 의해 발화되고, 의미가 부여되고, 맥락이 고정된 말을 다성적으로 전유하면서 결론적으로 발화주체의 권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첨예하고 영리한 투쟁이다.
- 「갱신하는 말, 다시 쓰는 미래 ― 세월호참사 10주년과 새로운 시적 시도들」(최선교) 중에서, 본문 229쪽
최근 시의 주체들은 영혼과 인간을 매개하는 영매처럼, 인간의 인식과 언어로 환원되지 않는 기이하고 낯선 타자를 향해 자신의 존재를 열어두고 있다. 그들은 멸망한 세계의 가장자리에서 예측할 수 없는 타자와 만난다. 폐허 속에 현현하는 번역할 수 없는 목소리는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한 만남의 한쪽 끝은 언제나 인간이었고, 앞으로도 인간이라는 점이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2020년대의 시적 주체는 타자 없이 존재할 수 없고 존재한 적 없는 자신의 근원적 조건을 절실히 깨닫는 중이지만, 그것이 곧 주체의 지위를 포기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인간에 비해 훨씬 광범위한 시공간에 분포하는 객체들은 ‘인간=세계’가 아님을 깨닫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인간의 자리를 손쉽게 포기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요컨대 “무한한 힘의 인식과 무한한 사물들의 존재 사이에서 발생하는 비대칭의 감각”은 인간을 “생물권이라 불리는 거대한 개체 내부”에 새롭게 “발붙이고 서 있게” 하지만, 그 순간에도 인간은 인간의 두 발로 서 있을 뿐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이러한 한계를 슬퍼할 겨를조차 없다.
- 「멸망 이후의 에피파니 ― 영매가 된 주체들」(하혁진) 중에서, 본문 264-2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