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망자는 말이 없다.
비로소 그가 여기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나눌 때나
신생아를 처음 받아안는 순간
그리고 무덤 앞에서 적막한
울음 이외의 다른 말이
더이상 필요치 않은 것은
서로가 살을 맞댄 이곳에
깊숙하고 가득히 눈을 감아도
잘 보이는 이토록 가까운 곁으로
이미 함께 와 있기 때문이다.
_「시인의 말」 전문
이 전부가 오직 너의 것이라 하여도
이 모든 게 다 너의 것이 아니라 하여도
이 세상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마저 한껏이어서
아이는 비틀거리며 두어 걸음 걷다가 쓰러지는 자전거처럼 까르르 웃는다. 함께 터뜨리는 둥근 웃음이 곧 사라져버릴 듯. 시인은 부풀어오른 불안을 닮아 어린 시절 떼어버린 보조 바퀴가 떠오른다. 손을 놓으면 안 돼, 손을 놓으면 안 돼. 뒤에서 들려오던 거친 호흡과 뒤처진 발소리를 지울 때까지 페달을 밟으며 뒤를 돌아보았을 때 시인의 짐받이를 붙잡던 이는 바큇살처럼 웃고 있다. 핏줄에 휘감겨 도는 체인은 그렇게 서로를 묶고, 아이는 말을 배우고, 아이의 등을 지켜보아주던 이의 등은 찌그러진 소쿠리만큼 어느새 휘어 있다. 등을 밟아달라는 부탁에 뒤에 오르는 “아이는 아직 가볍고/발걸음”(「보리 밟기」) 또한 심각하지 않다. 구름 같지만 아직은 흩어지지도 쏟아져내리지도 않을, 새파란 새싹 같은 시간 속에 잠겨 있는 동안의 시인은 아무런 비애도 가져보지 않는다. 그는 맞잡은 손을 풀었다 되잡는 아버지와 아들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다시금 놓치기도 하며 비스듬한/타원 궤도와 일정하지 않은 공전/주기에도 서로 아주 멀리/떨어지려 하지 않는”(「개기일식」) 그들. 교교히 자리에 멈춘 아버지가 자신의 위상을 그믐으로 줄였다 두 팔 벌려 만월이 되어줄 때, 아이는 그 품으로 와락 달려든다. 아버지의 가슴에 감싸안겨 아이는 이제 완전히 보이지 않지만 그럼에도 다 숨기지 못한 금환이 이글거린다. 금세 꼬물대기 시작하는 따스한 척력에도 아버지 등뒤에는 여전히 식은 역광이 존재하고 아이는 감춰진 채로도 그림자를 반짝반짝 불태운다. “열 살 무렵 개나리/그늘 아래 나란히//사십대 아버지와/찍은 사진을 보면//중년이 된 지금의 나는/사진 속 어린 나보다/그 시절 아버지를 더 닮았다.”(「부활」)
불능에 관한 기대가
사랑의 권력일 수 있다면
생전 처음 타인의 발톱을 깎아보는 어느 겨울의 저녁(「그믐」). 붉은 피가 맺히는데도 “아버지”는 움찔하거나 따갑다는 시늉조차 없이 생각에 잠긴 듯하고 핏방울만 몽글하게 부풀고 있다. 이마에 손을 얹으면 아릿한 이 계절보다 먼저 느껴지는 시린 침묵과 성긴 어둠. 대신 수염을 깎아드린 뒤 거울을 비추어드리면 이 창백한 추위처럼 아버지는 아무 말이 없다. “너무 오래 머물러 빛바랜 껍질만큼 투명하고/너무 오래 노력했지만 우화에 실패해/날개 꺾인 파리한 아버지가//그렇게 고요할 줄 알았더라면”(「저온화상」). “자기가 가진/전부를 다 주어도/모자라”(「일기예보」) 자신에게 없는 것마저 주려는 것이 사랑의 시작이란 것을 알게 해준 아버지에게 그는 “맞닿은 부분이 계속 함께/울릴 수 있도록 노래를 불러드렸으리라”. 작고 눈먼 새까만 씨앗 흩뿌리는 봄이 오고. 부디 하나만이라도 싹이 트기를 바라며 새까만 흙을 덮고, 새까만 비바람을 맞히고, 새까맣게 썩은 오물을 묻고. 아버지가 물려준 필름 카메라를 메고 바닥에 엎드려 이름 모를 풀꽃 하나를 찍으려 하는데 들려오는 ‘거기 뭐 있수’ 하는 소리. 그는 “그냥 잡초예요”(「무표정」) 하고 답하며 “여전히 잡놈으로 살”고 있지만 더이상 달뜨지도 아프지도 않는 봄과 함께 바닥에서부터 몸을 일으키지 않아도 되는, “웃음 짓지 않더라도/스스로 기뻐하는 법을 아는/나이가” 되어 있다. 눈부시게 새파란 달개비 한가득인 올해 이곳에서 아무것도 거두지 않기로 약속한다면. “모든 파랑보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파란빛 여기 놓아두기로 약속한다면. 시인은 그 색깔들 전부 바랜 시간과 씨앗으로 바꿀 순 없을까 하고 나지막이 말해본다. “당신이 여전히 여기 있다는 걸 압니다.//그래도 당신이 여기에 있었으면 좋겠어요”(「수확」).
손 놓으면 안 돼
겁먹은 내가 뒤를 건너보자
짐받이를 붙잡은 채
바큇살처럼 웃으시던
뭉클한 아버지의 무릎 같은
페달을 밟으면
서서히 움직이던 바퀴의 표정이
흐려져가는 속도로
아버지의 거친 호흡과
뒤처진 발소리를 지울 때까지
나는 넘어질까 두려워
뒤돌아보지 않았지만
손을 놓으면 안 돼
손을 놓으면 안 돼
아무 대답이 없어
자전거를 멈추었을 땐
이미 혼자서도
너무 멀리 와 있었다.
_「직립」 부분
난다시편을 시작하며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1.
2025년 9월 5일 출판사 난다에서 시집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시를 모아 묶었음에 ‘시편(詩篇)’이라 했거니와 시인의 ‘편지(便紙)’를 놓아 시집의 대미를 장식함에 시리즈를 그렇게 총칭하게도 되었습니다. 난다시편의 라인업이 어떻게 이어질까 물으시면 한마디로 압축할 수 없는 다양한 시적 경향이라 말을 아끼게 되는 조심스러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 모든 말이 시의 언어로 발산될 수 있기에 시인에게 그 정신과 감각에 있어 다양함과 무한함과 극대화를 맘껏 넘겨주자는 초심은 울타리 없는 초원의 풀처럼 애초부터 연녹색으로 질겼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단호함은 있습니다.
2.
난다시편의 캐치프레이즈는 “시가 난다winged poems”입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버려야 할 무거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날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가벼움은 무엇일까 생각했습니다. 바람처럼 꽃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몸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사랑처럼 희망처럼 날개 없이도 우리들 마음을 날 수 있게 하는 건 시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하여 온전히 시인의 목소리만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을 빚어보자 하였습니다. 해설이나 발문을 통한 타인의 목소리는 다음을 기약하자 하였습니다. 난다는 건 공중에 뜰 수 있다는 무한한 가능성의 말이니 여기 우리들 시를 거기 우리들 시로 그 거처를 옮김으로 언어적 경계를 넘어볼 수 있겠다는 또하나의 재미를 꿈꿔보자 하였습니다. 시집 끝에 한 편의 시를 왜 영어로 번역해서 넣었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시인의 시를 되도록 그와 같은 숨결로 호흡할 수 있게 최적격의 번역가를 찾았다는 부연을 왜 붙이는가 물으신다면 말입니다.
3.
난다시편은 두 가지 형태의 만듦새로 기획했습니다. 대중성을 담보로 한 일반 시집 외에 특별한 보너스로 유연성을 더한 미니 에디션 ‘더 쏙’을 동시에 선보입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시의 순간”이라 할 더 쏙. 7.5×11.5cm의 작은 사이즈에 글자 크기 9포인트를 자랑하는 더 쏙은 ‘난다’라는 말에 착안하여 디자인한 만큼 어디서든 꺼내 아무 페이지든 펼쳐 읽기 좋은 휴대용 시집으로 그만의 정체성을 삼았습니다. 단순히 작은 판형으로 줄여 만든 것이 아니라 애초에 특별한 아트북을 염두하여 수작업을 거친 것이니 소장 가치를 주기에도 충분할 것입니다. 시를 읽고 간직하는 기쁨, 시를 쥐고 스며보는 환희. 건강하게 지저귀는 난다시편의 큰 새와 작은 새가 언제 어디서나 힘찬 날갯짓으로 여러분에게 날아들기를 바랍니다.
[ 시가 난다 WINGED POEMS ]
001 김혜순 시집 싱크로나이즈드 바다 아네모네
002 황유원 시집 일요일의 예술가
003 전욱진 시집 밤에 레몬을 하나 먹으면
004 박유빈 시집 성질머리하고는
005 정일근 시집 시 한 편 읽을 시간
006 곽은영 시집 퀸 앤 킹
007 채길우 시집 아버지를 업고
008 문혜진 시집 무증상 환자(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