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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

서문
새로운 문명의 단서들: 나혜석과 염상섭 사상의 재인식

핵심저작
【나혜석】
1장 자주와 자립
2장 여성의 각성과 3·1운동
부록: 『인형의 가』 주제가 가사

【염상섭】
1장 여성·노동 그리고 개성의 해방
2장 사상으로서의 문학
부록: 자서 / 서

나혜석 연보
염상섭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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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저자 : 나혜석羅蕙錫
일제강점기 화가·작가로, 서양화와 근대소설의 개척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토오꾜오여자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공부하고 개인전과 단체전에 참가하며 작품활동을 펼쳤다.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여성 예술인으로서 사회적 제약과 고정관념에 도전했다.

저자 : 염상섭廉想涉
일제강점기 소설가·언론인으로, 『동아일보』 기자 등으로 활동하며 식민지 현실을 예리하게 묘사한 소설들을 발표했다. 대표작으로 「표본실의 청개구리」 『삼대』 「해바라기」 「만세전」 등이 있다. 한평생 장편소설·중단편소설·평론 등 다양하고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편저자 : 강경석姜敬錫
문학평론가.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비평활동을 시작했고, 현재 『창작과비평』 편집위원으로 있다. 저서로 『리얼리티 재장전』 『개벽의 사상사』(공저), 『안창호: 민족혁명의 이정표』(편저) 등이 있다. 제18회 우현예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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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단 한번도 스스로 굽히지 않은 ‘문제적 개인’ 나혜석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난 나혜석(1896~1948)은 1913년 17세의 나이로 보통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일본 유학길에 오른다. 바로 다음해에 토오꾜오 조선인 유학생 잡지에 글 「이상적 부인」을 발표하면서 “자기 개성을 발휘하고자 하는 자각을 가진 부인” “현대를 이해한 그 시대의 선각자”로서의 여성상을 제안한다. 그 뒤로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활동을 비롯하여 귀국 이후의 3·1운동 참여와 여자미술학교 설립과 운영, 국외 항일세력에 대한 후원 등 진보적 페미니스트로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며 ‘문제적 개인’의 탄생을 알렸다.
여전히 보수적인 남성중심 사회였던 20세기 초 식민지 조선에서 나혜석은,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비난에 시달린다. 바로 천도교 지도자 최린과의 이혼 스캔들에 휘말렸기 때문인데, 이는 나혜석의 생애 전반에 불우한 그늘을 드리웠다. 그러나 이처럼 신변상의 어려움에도 나혜석은 여성해방의 선도자로서 자기 역할을 잊지 않는다. “예술이 무엇이며 어떠한 것이 인생인지, 조선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겠고 조선 여자는 이리 해야만 하겠다는 것을, 이 모든 일이 결코 타인에게 미룰 것이 아니라 내가 꼭 해야 할 일이었다”(22면)고 그는 고백한다.
이 책의 엮은이 강경석은, 나혜석을 포함한 당대 여성운동가들이 자유주의적이고 부르주아적인 운동, 소극적 항일운동에 머물렀을 뿐이라는 비판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한다. 우선 일제강점기에 나혜석이 전념한 ‘개성의 해방’과 ‘여성해방’은 당시의 검열을 피하기 위한 암시적 글쓰기였기에 이를 쉽게 과소평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나혜석 아닌 누가 일제강점기에 “자기 생명의 존귀와 위력을 체험”해야 “조선 사람의 생활개량이 근본적이요 계속적일 것이며 근본적일 것”(49~50면)이라고 말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그의 최측근이었던 남성 지식인들이 급속히 친일로 훼절해버린 것과 비교하면, 나혜석의 입장은 시종일관 변함없이 해방을 지향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의 10년 생활 중에는 계급과 빈부와 귀천의 굴곡이 가로 내려질리고 세로 흘러 나를 웃기고 혹 울리고, 즐겁게 또는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억제케 하는 것은 오직 내게 깊이 뿌리 박혀진 예술심과 보리심이다.(23면)

여기서 나혜석이 말하는 보리심(菩提心)은 본인 혼자 깨우치는 배움이 아니라 중생 전체의 교화를 바라는 마음이며, 이 같은 보편 지향의 성찰은 나혜석의 예술세계 전반을 아우른다. 이는 “모든 것의 출발점은 다 자아에게 있”되 종국에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나와 중생을 함께 이끄는 마음이다. 이처럼 사회성을 다분히 띤 대승적 사상은 나혜석의 예술론과 여성해방론의 바탕을 이루었고, 그렇기에 그는 식민지 시기 자치론과 참정론의 오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인형의 집’을 벗어난 나혜석이 당대 현실의 제약 가운데 스스로를 희생하고 말았다는 서사가 흔하지만, 사실 그는 거의 단 한번도 외력에 스스로를 꺾지 않았다.”(24면)

근대극복과 근대적응의 이중과제를 예리하게 간파해낸 작가, 염상섭

1897년 서울의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난 염상섭은 10세 때까지 할아버지로부터 한학을 배웠다. 곧이어 보통학교에 입학한 그는 학교에서 조선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자퇴하고 얼마 뒤 일본 유학을 떠난다. 1920년 귀국한 뒤에는 『동아일보』 창간 기자로 일하며 『폐허』 동인 등으로 활동한다. 이 시기부터 염상섭이 내놓은 작품들을 놓고 어떤 비평은 ‘자연주의’라고 규정하며 염상섭이 자본주의 근대를 조건 없이 수용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의 엮은이 강경석은 염상섭이 근대에 회의적이고 비판적이었으며 사회주의나 아나키즘 같은 근대극복의 사상들에 열려 있었다고 말한다. 정확하게는 염상섭이 당대 어수선했던 사상의 난립을 지켜보며 그중에서 식민지 현실에 맞게 다양한 사상을 융합하고 시의적절한 대응을 펼쳐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근대극복의 지향을 놓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본주의 근대를 건너뛰지도 않”았다.(28면)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자본주의에 대해 좀더 숙고하고자 하는 염상섭의 사상적 고투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아무리 새로운 생활환경에 안적(安適)할 수 있더라도 민족적 개성을 상실하였거나 지리적 조건으로 약속된 민족의 전통을 무시하는 사회원은 자연의 이법에 귀순하려는 인류의 신(新) 행로의 동행자가 되기 어려울 것이다. 어떠한 세대, 어떠한 생활조직하에서라도 반도의 흙은 조선말을 하는 사람과 및 그의 자손의 손에서 갈〔耕〕리고 조선말은 반도의 흙을 가는 사람 이외의 사람의 입에서 회화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221면)

염상섭은 자연과 문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기보다 자연이 근대 문명을 품는 관계로 보았다. “개성의 표현은 생명의 드러남이며, 개성이 없는 곳에 생명은 없다”(166면)는 염상섭의 말은 인간의 분투를 넘어선 자연의 대법칙이 있기에 이를 목표로 삼고 매진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 목표에 매진할 생각이 없다면 “인류의 운명은 내림길”이며 “인류는 쇠미하여갈 길밖에 없다”는 그의 제언은 21세기에 사는 우리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결국 염상섭이 지적하는 것은 자연이 직조해낸 근대 인간문명을 기계의 노예로 전락시킨 것, 그것도 물질적으로만 노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노예로 만든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근대 자본주의가 자연을 어떻게 착취하는지를 면밀히 살핀 그의 논설은 당대의 문명전환을 예리하게 간파했다. 그는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초를, 문명의 전환은 불가피하되 물질문명이 이뤄낸 성과를 바탕으로 새로운 꿈을 꿔야 할 시기라고 보았다. 이는 물질문명이 계층 간 불평등과 기후 및 생태 위기를 더욱 가속화하는 21세기 현재에 더욱 절실한 관점이다. 물질과 정신을 단순히 대립시키지 않고 그 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뒤집고자 했던 염상섭의 사상을 다시 소환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물론 이때 염상섭의 사상을 다시 불러내서 펼칠 실천의 장은 남북을 아우르는 한반도다.

문명전환의 과제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고자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의 도전적 기획

지구기후와 자본주의가 불가분의 위기를 맞닥뜨리고 각종 갈등이 팽배한 지금 이 시대에 우리가 떠맡은 과제는 결코 가볍거나 단순하지 않다. 백낙청(서울대 명예교수)을 필두로 하는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위원회는 이 모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과제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전환’이라는 강력하게 실천적인 과제는 우리 모두에게 다른 삶의 전망과 지침이 필요하며, 전망과 지침으로 살아 작동할 사상이 절실함을 뜻한다. 그런 사상을 향한 다급하고 간절한 요청에 공명하려는 기획으로서, 창비 한국사상선은 한국사상이라는 분야를 요령 있게 소개하거나 새롭게 정비하는 평시적 작업을 넘어 어떤 비상한 대책이기를 열망하며 구상되었다. (「창비 한국사상선 간행의 말」에서)

서구사상은 오랜 시간 세계 지성계에서 압도적 발언권을 유지하는 한편 오늘날의 위기에 대해서도 이런저런 대응을 내놓고 있다. 그럼에도 그 강력한 위상의 이면에 강고한 배타성과 편견이 작동하고 있음은 이제 주지의 사실이다. 사상적인 면에서도 서구가 가진 위상은 돌이킬 수 없이 상대화되었고 보편의 자리는 진실로 대안에 값하는 사상들의 분투에 열려 있다. 이 시점이야말로 유·불·선의 회통이나 개벽사상 등 한국사상 특유의 사상적 기획이 한국사상이 전지구적 과제를 향해 독자적인 목소리를 보태기에 더없이 적절한 때일 것이다.
창비 한국사상선 사상가들의 사유에는 역사와 현실을 탐문하며 새로운 삶의 보편적 전망을 구현하려 한 강인한 실천성, 그리고 사회를 변혁하는 일과 개개인의 마음을 닦는 일이 진리를 향한 단일한 도정에 있다는 깨달음이 깊이 새겨져 있다. 한반도의 경험과 지혜가 응축된 사상적 활력을 드러내는 창비 한국사상선이 문명전환의 개벽적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의미있는 밑거름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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