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우리가 아는 의사 선생님은 늘 냉철하고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책은 그 두터운 흰 가운을 벗겨내고, 그 안에 숨겨진 한 인간의 떨리는 어깨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성공한 병원장의 화려한 이력서 뒤에는 동업의 배신에 잠 못 이루던 밤이 있었고, 권위 있는 전문가의 얼굴 뒤에는 첫사랑을 그리워하는 소년의 마음이 숨어 있었다. 배규룡 작가는 자신의 삶을 미화하지 않는다. 대신, 비겁해지고 싶었던 순간과 무너지고 싶었던 찰나를 정직하게 고백한다. 그 솔직함이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거창한 영웅담보다, 끝내 도망치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켜낸 한 평범한 가장의 투쟁기가 더 위대할 수 있음을 이 책은 증명한다.
책 속에서
산 중턱으로 난 길을 오르다가 푸드덕 날아가던 꿩과 후다닥 뛰어 도망가던 산토끼를 보았다. 산에도 토끼가 살다니, 잡아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또 닭처럼 커다랗지만, 모양은 그보다 훨씬 더 예쁜 꿩도 잡아 보고 싶었다.(…) 마을을 휘감고 흐르는 시냇물은 늘 맑았다. 여름이면 친구들과 발가벗고 냇물에 뛰어들었고, 올갱이도, 징게미도, 미꾸라지도, 붕어도 잡을 수 있었다.
- p.14
영어 시험지를 받고 문제를 풀었다. 어쩐 일인지 백 퍼센트 영작 문제였다. (...) 그런데 두 번을 다 보고 페이지를 넘기자 붙어 있는 두 페이지가 더 있었다. 아니, 두 번이나 넘겨도 못 볼 정도로 두 장이 붙어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넘긴 시험지에는, 백지 상태의 문제가 가득했다.
- p.70
넉넉하진 않았지만, 그 시절은 가난한 대신 행복이 풍족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평생 떠돌았다. 국민학교 시절부터 객지 생활, 기숙사, 독서실, 고시원… 늘 혼자였다. 그러던 내가 결혼을 했고, 나의 옆에는 예쁜 아가씨가 항상 함께하고 있다. 정말이지, 지금도 신기했다.
- p.129
기적처럼 포기하려던 그 순간, 환자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환자가 살아나며 내 삶도 다시 이어졌다.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이 갈리는 순간, 나 자신의 삶과 죽음도 함께 갈렸다. 그 고비를 넘긴 이후, 나는 의료인의 삶이란 결국 끝없는 책임과 감당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깊이 절감했다.
- p.151
신호 대기로 서 있던 택시 버스의 모든 승객이 그 장면을 다 쳐다보고 있었는데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말 안 해도 다 이렇게 상상했을 것이다. ‘저 작은 한국 노인이 저 거구의 젊은 백인 아가씨 꼬시려고 저렇게 많은 장미를 사 주었구나.’ 아무튼 한 아름이나 되는 장미를 안고 그는 매우 행복해했다. 쪽이 좀 팔리긴 했지만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 p.177
인생은 노력한다고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행복은 노력한다고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모두 “마치 한 번도 리허설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오른 배우”같다고. 나의 인생도 그처럼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거치며 부침을 거듭했다.
- p.223
환자들의 진짜 목소리를 듣고 싶어 매달 간호부장과 함께 병실을 돌았다.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불만 섞인 글 하나하나에도 직접 답글을 달았다. 홍보팀 직원이 아니라 병원장이 직접 사과하고 해결을 약속하는 모습에 차갑게 돌아섰던 환자들의 마음도 조금씩 녹아내리는 것을 느꼈다.
- p.225
살아보니 솔직함이 가장 강력한 무기더군요. 거짓말을 하거나 포장하면 남들이 모를 것 같아도 다 알아채요. 한 번의 거짓말이 그 사람의 모든 말을 의심하게 만들고 신뢰를 무너뜨리죠. 제 부끄러운 부분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독자들도 제 글을 신뢰해 줄 것이라 믿었습니다.
- 작가 인터뷰
궁금한 건 꼭 해봐야 직성이 풀렸습니다. 제천에서 개원했을 때나 충주의료원장으로 일했을 때는 새롭게 배울 것이 많았어요.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어떻게든 끈질기게 파고들었습니다. 책 읽는 습관도 도움이 많이 되었고요. 끊임없이 배우고 삶에 적용하려는 태도가 위기 때마다 저를 지켜주었죠.
- 작가 인터뷰
인생은 한 권의 책과 같습니다. 다만,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는 책이죠. 장편소설을 기획하고 서론만 잔뜩 썼는데 갑자기 끝나버리면 너무 허무하잖아요. 그래서 저는 인생을 ‘미니시리즈’처럼 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디서 끊기더라도 그 자체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가 되도록 말이죠.
- 작가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