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자연과 사람을 오래 바라보다 보니 새로운 인연이 생기면 또 다른 인연이 사라지고, 조건이 바뀌면 삶의 모습 또한 달라진다는 너무도 당연한 이치를 조금씩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말해온 연기(緣起)였고 극단에 치우치지 않으려 애써온 바른 도리, 즉 중도(中道)의 삶이었다.”
- 2026년 봄, 이왈종
서울을 거쳐 제주로 향한 이왈종 화백. 수묵을 중심으로 흑과 백이던 그의 화면은 어떻게, 화려한 색채와 생명력을 지닌 작품으로 향할 수 있었을까. 예술을 향한 열망 하나로 자신을 제주로 옮겼던 청년 이왈종은 어떻게, 작업이 이끄는 곳으로 그저 몸을 맡기는 자연스러움을 지닐 수 있었을까.
“제주라는 구체적인 삶의 자리 안에서, 중도는 더 이상 관념이 아니라 눈앞의 풍경이 되었다. 이 섬의 풍경은 예술을, 그리고 삶을 풍요롭게 한다. 높은 건물과 화려한 조명이 아닌, 바람과 들에서 풍요가 온다니.”(99p)
제주 생활 40년을 바라보는 화백에게 제주의 풍경은 여전히 놀라움이자 축복이다. 이는 제주가 지닌 생경한 자연이 뿌리이나, 사슴과 물고기, 사람과 자동차, 자연과 문명을 한 화면에 등장시키는 화백의 시선에도 몫이 있다. 이왈종의 ‘중도(中道)’는 그렇게 탄생한다. 화백이 풀이한 『반야심경』, 그곳에 깃든 제주의 풍경은 생활과 예술을 구분하지 않는 균형의 증거이다. 화백은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 산뜻한 리듬과 다채로운 작품을 만나보자. 따스한 제주의 숨이 당신의 일상에 자그마한 쉼을 불어넣을 것이다.
“꽃과 새, 물고기와 노루, 일상의 사소한 풍경들을 그리며 내가 전하고 싶었던 말은 언제나 하나였다. 삶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마음이 무거워질 때도, 너무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말이다.”
책 속에서
파도가 쓸고 가면/ 모래는 또 다른 무늬를 만든다./ 어떤 무늬는 오래 남고,/ 어떤 무늬는 금세 사라진다./ 사람의 하루도 그런 무늬로 덮여있다./ 남는 것과 사라지는 것 사이에/ 옳고 그름은 없다./ 그럴 수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_27쪽
한쪽으로 기울지 않으려 애썼고, 중심에 서 있으되 그 자리에 고정되지는 않으려 했다. ‘생활 속의 중도’라는 말도 결국은 그렇게 살겠다는 다짐에 가깝다. 거창한 철학이라기보다는, 매번 극단을 피해 돌아오려는 습관 같은 것이다.
_57쪽
큰 달 아래 억새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보고 있노라면, 가족도 없는 집으로 왜 가나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외로움이 길어지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마음 한구석에는,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다짐 같은 게 남아 있었다. 환경이 바뀌지 않으면 작업도 달라질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몸을 움직였고 제주에 머물렀다.
_86쪽
아무리 작은 미물도 인연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가상. 형식의 한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 가지만 고집하는 것은? 나는 그저 자유로 향하고 있다.
_109쪽
하지만 내가 바라는 관람의 방향은 조금 다르다. 의미를 찾기보다 먼저 보는 일, 판단하기보다 잠시 머무는 일이다. 그림은 설명을 들은 뒤에야 열리는 문이 아니다. 이미 열려 있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들어가면 된다.
_130쪽
자연은 내게 위안에 그치지 않는다. 작업이 막힐 때마다 나를 다시 제자리로 돌려보내는 스승에 가깝다. 내가 너무 복잡해졌을 때, 자연은 언제나 단순한 상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 앞에서 다시 숨을 고른다.
_1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