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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얼음 만들기 | 최근에 읽은 책은 무엇인가요 | 흰 커튼 | 친구를 만나러 간다 | 실내화 | 풍뎅이 | 양송이수프 | 국립중앙도서관 | 이 책에는 | 내가 말을 할 때 | 말해봐 말해봐 말해봐 그게 무슨 소린지 | 주택이 끝나는 곳 | 머릿속에서 수건을 꺼낸다 | 나무 상자 | 하지 | 성묘객들은 밝은 옷을 입는다 | 성탄절이 이상하다 | 표시를 할게 | 풀에 베이지 않도록 | 정오의 총알

2부
시간관념 | 도마를 보여줘 | 매미가 울었다 | 기웃거리는 사람 | 종이컵 | 오늘의 자연 분해 | 아무것도 없는 묵념 | 출장 | 누가 나오기로 했는지는 모른다 | 이 비 | 소년 | 눈이 굳어지기 전에 | 가볍게 걷기 | 초록과 조금 더 어두운 초록과 | 시내로 나가면 어떠니 | 장위동으로 갔다 | 드라이클리닝 | 브로콜리 유튜브

3부
X | 22:22 | 개미는 그만두지 않는다 | 서울 그리고 겨울 | 휴관 | 머그컵 | 맨발 | 클랙슨 | 노트 | 스노우사파이어 | 왜 벤치에 페인트를 칠하나 | 통화

해설
반전의 시간 · 이희우
저자 소개
저자 : 이수명
시인 이수명은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4년 『작가세계』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시집 『새로운 오독이 거리를 메웠다』 『왜가리는 왜가리놀이를 한다』 『붉은 담장의 커브』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 『언제나 너무 많은 비들』 『마치』 『물류창고』 『도시가스』, 산문집 『나는 칠성슈퍼를 보았다』 『내가 없는 쓰기』 『정적과 소음』 『흰 컵의 휴식』, 연구서 『김구용과 한국 현대시』, 비평집 『공습의 시대』, 시론집 『횡단』 『표면의 시학』, 번역서 『낭만주의』 『라캉』 『데리다』 『조이스』 등이 있다. 박인환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노작문학상, 이상시문학상,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상, 루시엔 스트릭 번역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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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나쁜 날씨, 미친 사람들,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들
세계의 표면을 관망하는 무위의 미학

오전에 택배 박스가 온다. 박스 속에는 책이 들어 있다. 책이 작은 조각들로 잘려 있다. 어떻게 조각을 맞춰야 하는지 모르겠다.

한 조각을 꺼내 펼친다.
발을 뻗는 사
사람일까, 사자일까, 사이일까, 사막일까,

어떤 낱말이든 너무 꽉 붙들면 안 된다.
헐렁한 옷을 찾아 입는다.

물을 마신다. 숨을 쉬고 마시고 쉬지 않고 마신다. 깨어나서 마시고 깨지 않고 마신다. 나에겐 인간이 없다. 인간은 창밖 저기 거리에서 신속하게 걷는 자들이다.

그들은 걸으며 결코 머리 위를 쳐다보지 않는다.
위가 펼쳐지지 않도록

나는 도무지 밖으로는 나가지 않는
멀쩡한 하루
─스노우사파이어 부분

정오가 오기 전의 세상은 “앞이 잘 보이지 않”으며, “어두운 하늘을 아무것도 날지 않는다”(「가볍게 걷기」). 오전에 도착한 택배 박스 속에는 잘린 책이 들어 있고, 나는 한 조각을 꺼내어 낱말을 맞춰보지만 이내 단념하고 만다(「스노우사파이어」). “아무도 모르는 집”(「시인의 말」)에 머무르는 은둔자는 “얼음이/장난치면서/녹는 것을//바라보”(「얼음 만들기」)거나 “엎드려서 남은 공기가 타는 소리를”(「주택이 끝나는 곳」) 듣는다. 벽에 붙은 “정체 모를 거미와 함께 연속적인 호흡을 하려”(「22:22」) 하고, “가구를 타고 오르는 개미”(「개미는 그만두지 않는다」)를 바라볼 뿐이다.
이처럼 이수명의 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한 시간 속에서 시작된다. 사건은 지연되고, 행위는 멈추며, 세계는 조용히 꺼져 내린다. “나쁜 날씨, 미친 사람들, 약해지고 사라지는 것들”과 같이 인간의 시야에 잘 포착되지 않는 세계의 표면을, 시인은 오랜 시간 집요하게 응시해왔다. 이번 시집 또한 관망의 미학 위에서 전개된다. 시집의 해설을 쓴 이희우 문학평론가는 이러한 상태를 “조용해지기, 은둔하기, 생명력의 최소화”로 진단하며, 그것이 “세계의 ‘기분stimmung’을 예민하게 느끼고 그에 영향을 받는”(─해설, 「반전의 시간」) 우울증자의 감각에서 비롯된다고 말했다. 한편 주체의 결핍과 무능함은 개인의 문제가 아닌 세계의 불능에서 기인한다고 보았다. 고장 난 세계에서 “소방 당국은 산불을 끄지 못했”으며, “경찰은 방화 용의자를 체포하지 못했다”(「주택이 끝나는 곳」). 비가 전국적으로 동시에, 무표정하게 내리는 세상 속에서(「휴관」) 화자는 위층 사람들이 싸우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든다(「말해봐 말해봐 말해봐 그게 무슨 소린지」). 정오가 오기 전의 세계는 이처럼 파리한 적막 속에 놓여 있다.

최악과 최선이 겹쳐지는 반전의 시간
빛의 극점에서 목도하는 생과 경외

너는 비로소 차분해진 것인가, 언제든 죽은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망에 붙은 벌레를 떼어낼 필요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방충망을 가볍게 치니 매미는 정오의 총알처럼 솟아오른다.
─정오의 총알 부분

빛이 가장 강하고, 그림자가 가장 짧은 정오는 “매미조차 노래하지 않는 시간이다. 모든 것이 정지하고, 조용해지고, 죽음에 가까워”(─해설, 「반전의 시간」)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세 개의 시곗바늘이 교차하는 순간 은둔자의 놀이는 마침내 중단되고 생은 폭발한다. 약해지고 사라지던 것들은 더는 소멸의 기미로만 남지 않는다. “방충망을 가볍게 치니 매미는 정오의 총알처럼 솟아오”(「정오의 총알」)르고, “빛이 다시 켜지면 나는 그가 뽑다 만 풀을 뽑는다”(「하지」).
과거에 시인은 시 쓰기를 향한 태도와 신념에 대하여 “시는 암흑을 품는 것이다. [……] 우리가 경외하는 것은 암흑 쪽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횡단』, 민음사, 2019)라고 밝힌 바 있다. 정오의 빛을 응시하는 순간, 우리의 눈은 멀고 가장 밝은 곳에서 끝내 암흑을 마주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러나 시인의 시 세계에서 암흑은 소멸이나 공백이 아닌, 죽은 듯 멈춰 있던 것들이 다시 움직이고, 가장 미세한 생의 징후가 폭발하는 반전의 시간이다. 빛과 암흑이 공존하는 정오의 시간, 시인은 마침내 암흑 속 경외의 대상을 목도한 듯하다.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세계,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가장 급진적인 생이 이번 시집 『정오의 총알』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시인의 말

정오에 집을 나선다
아무도 모르는 집

2026년 3월
이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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