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 강경애 >
암울한 시대를 통과하며 “불길” 같은 메시지를 전하다
강경애 대표 중단편 「소금」, 「원고료 이백 원」, 「지하촌」
「소금」은 간도 이주민 여성의 비참한 삶을 그려낸 중편소설이다. 봉염이 가족은 빚에 쫓겨 만주로 건너가 중국인 지주 팡둥의 소작농으로 생계를 이어가지만 날마다 중국 군대 보위단에게 위협을 당하고 자위단의 수탈에도 시달린다. 그러던 중 남편이 공산당에게 죽임을 당하자 큰아들 봉식마저 집을 나가버리고, 결국 팡둥의 집에 기거하게 된 봉염 어머니는 그에게 겁탈을 당해 임신하게 된다. 막달이 다가오던 날, 팡둥은 봉식이 공산당이라는 이유로 처형당했다고 말하며 이들을 매몰차게 내쫓는다. 봉염 어머니는 차라리 아기를 낳아 죽일 생각을 하다가도 이내 모성애를 느끼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봉염 어머니는 ‘젖유모’로 돈벌이를 하지만, 열병에 걸린 아이들은 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다 죽고 만다. 봉염 어머니는 자식을 다 잃고도 일신이나마 보전해야겠다는 생존 욕구를 느끼며 몸서리친다. 마침내 소금을 밀수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데, 무거운 소금을 이고 돌아온 그에게 들이닥친 것은 관염(官鹽)을 증명하는 ‘소금표’를 내놓으라는 순사의 호령이다.
「원고료 이백 원」은 자전소설로 졸업을 앞둔 동생 K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작품이다. ‘나’는 신문 연재 장편 고료로 받은 이백 원을 어떻게 사용할지 고심하며 생활고로 힘들었던 지난날을 떠올린다. 학창 시절 동무의 필기구를 훔쳐 ‘도적년’이라 놀림받던 일, 남편 친구의 아내가 신던 구두를 받고 설움을 삼키던 일 등등. 그러나 이 돈으로 가난과 질병에 고통받는 친구를 돕자는 남편을 향해 ‘나’는 울분을 터뜨린다. 결국 문밖으로 쫓겨난 ‘나’는 자신의 처지와 도리를 자각하고 동지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 얼마나 “떳떳한 일”인지 깨닫는다. 이처럼 ‘나’는 K에게 원고료 이백 원을 둘러싼 곡절을 들려주며 고향을 떠나 유랑하는 군중과 굶주린 무산대중을 결코 잊지 말 것을 당부한다. 또한 지금은 사사로운 이상에서 벗어나 “실천으로 말미암은 참된 지식”을 얻어야 할 때라면서 지식인으로서 갖추어야 할 태도를 강조하며 편지를 마친다.
「지하촌」에서 주인공 칠성은 어릴 적 경풍을 앓아 다리가 성치 않은 장애인으로 동냥으로 생계를 이어나간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그는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동냥을 계속하고 어머니 역시 해산한 이튿날에도 일을 하지만 궁핍한 생활은 나아지지 않는다. 칠성이 흠모하는 큰년이네 집도 형편이 다르지 않은데 큰년이 또한 시각장애인으로 가난 때문에 어느 장사꾼의 첩으로 시집을 가게 된다. 이렇듯 지하촌 사람들은 노동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극한의 빈곤 속에서 장애를 지니고 살아가고 있지만, 본래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가난으로 인해 병을 앓다 제때 치료받지 못한 까닭이다. 칠성은 혼사를 막고자 큰년의 옷감을 끊으러 읍에 가게 되고, 자신처럼 다리를 저는 걸인을 만난다. 그는 칠성에게 “우리가 왜 이 꼴이 되었는지 알아야 하지 않”느냐고 역설하는데, 돌아와 보니 마을은 폭우에 둑이 터져 난리가 나고 큰년은 이미 시집간 뒤다. 칠성의 눈앞에 펼쳐진 지하촌의 세계는 더욱 생경하면서도 참담하게 다가온다.
< 한유주 >
“소금을 머리에 이고 온 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여자들”
그때보다 지금은 과연 괜찮은 삶인가,
한유주, 강경애의 「소금」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다
「바라건대」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화자들의 “지켜봄”, 즉 ‘시선’이다. 그것은 단순히 관찰에만 머물지 않고 적극적인 ‘관심’과 ‘개입’으로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예인에서 인화로 화영으로 영경으로, 경미에서 미아로 이어지는 장면 속에서 화자들은 어떤 대상 또는 풍경을 바라보거나 그 자신 또한 대상 또는 풍경이 되기도 한다. 정확한 나이도 직업도 알 수 없는 그들에게 “사건”이나 “사태”라 할 만한 것은 다만 기억 속에서 발생한 것으로, 현재 상황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억’을 통해 누군가는 십여 년 전 어느 여름날 연인의 이별 통보를 환기하고, 누군가는 빛바랜 잡지를 보다 심장이 세게 뛰는 신체적 반응을 경험한다. 기억은 지나간 것에 머물지 않고 현재를 파고들며 또 다른 ‘여자들’을 비춘다.
커다란 짐 가방에 몸을 기댄 채 벤치에서 잠든 여성을 지켜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이는 이십여 년 전 지하철에서 헤매던 한 소녀를 떠올리며 회한에 잠긴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삶을 꿈꾸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중얼거리는 누군가는 무거운 가방을 든 여자를 돕겠다고 나선다. 한쪽이 처진 여자의 어깨가 마치 “온 인생을 담은 것처럼” 무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소설의 시간이 “동선 위에 동선, 사람 위에 사람, 무덤 위에 무덤”의 모습으로 흐르는 것처럼, 강경애의 「소금」에서 불러온 ‘짐 진 여자’ 들은 그렇게 ‘금요일 저녁 한강 이남 지역’, 즉 현대의 시공간으로 옮겨진다. 그리고 소설은 도심 한복판에서 언젠가 지나쳤을 ‘동선’과 ‘사람’과 ‘죽음’ 들을 가늠하면서 우리를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이끈다. ‘그때와 지금은 어떻게 다른가’, ‘그때보다 지금은 과연 괜찮은 삶인가’ 하고.
강경애와 한유주, 백 년의 시간을 이어
‘지금 여기’에서 써 내려간 여자들의 서사
해산한 지 얼마 안 되어 차고 뻣뻣한 파뿌리를 씹어 먹는 여인. 중국인 지주와 일제의 경찰에 학대받고 죽임을 당한 남자. 먹은 것이 없어 피똥을 누는 아기. 다리를 절고 눈이 먼 사람들. 모두 강경애의 소설 속 인물들이다. 그러나 절절하게 그려진 비극들이 현재에도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주변의 멀지 않은 곳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한유주는 「바라건대」를 쓰고 난 후 에세이에서 “소금을 머리에 이고 온 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하는 여자들”을 많이 생각했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는 소회를 남긴 바 있다. 강경애의 소설을 읽고 다시금 써 내려간 한유주의 소설은 이렇게 묻고 답한다. “미아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누군가가 미아의 호위가 되어줄까? 알 수 없는 일이다”라고. 미아는 등장인물 중 한 명이지만, 소설을 읽는 ‘우리’를 대입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누군가가 우리의 호위가 되어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위태로운 걸음을 내딛는 누군가를 계속 시야에 담을 수 있고, 혹시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닌지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의 호위”가 되어주기를 바라는 소설 속 인물들의 ‘바람’이자, 어쩌면 작가 강경애와 한유주가 오래도록 품어온 ‘바람’이라고 이 책은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