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추천사
이원익 (법사)
영지 김정자 화백의 생활과 여든 평생의 삶이 녹아 있는 수필집의 발간을 축하 드립니다.
태어나 어린시절을 보내신 대구에서부터 대학시절을 보낸 서울에서 겪은 인상 깊었던 여러 일화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미국으로 이주하신 후 화가로서의 뜻을 되살리시어 매진하시는 틈틈이 적어 놓으신 여러 가지 만남의 이야기들과 수시로 떠오르는 갖가지 감상이 잘 녹아 있는 글모음입니다.
그리고 김 화백께서는 독서에도 게을리하지 않으시어 여러 시인과 문인들의 좋은 글구절을 메모하고 나름으로의 느낌과 현실에서의 인연을 연결해 놓으신 솜씨가 자연스러우면서도 빼어나 보이며, 평범한 듯하면서도 비범합니다.
여생의 건강과 건필, 그림과 글 둘다 좋은 작품 많이 남기시길 바랍니다.
책 속으로
〈사막으로 이사를 하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그리도 꿈꾸던 한적한 곳, 숨어 살기에 홀로 살기에 좋은 이 사막 도시로 이사를 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나그네 되어 살고 싶은 꿈.
타고르의 ‘멀리 숨어 살면 깊고도 아름다운 꿈을 꾸며 살 수 있다.’라는 말이 이리도 긴 시간이 흐른 지금에야 이루어지고 있음이 마냥 가슴 설레고 행복하기 그지없다.
산그림자에 엎어져 실컷 울어도 좋은 어느 고독한 시인의 그런 산은 아니지만, 드넓게 펼쳐져 있는 모래언덕 너머 길고도 누런 모래 산이 끝 간데없이 이어져 있는 이곳에 작은 집을 지었다. 그리고 지금 고독을 안고 살기에 족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지금은 여름철. 사막에 드리운 태양이 대지를 후끈 달구고 있지만, 밤이 되면 맑은 바람 코발트 블루의 짙은 밤하늘에 달과 별이 유난히 반짝인다. 그래서 조금은 덜 외롭고 더욱 이곳을 사랑하게 된다.
세상사엔 원래부터 관심이 없는 내가 시간과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묵묵히 넓고 포근한 사막의 품에 길들어지는 데에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깊은 잠 속으로 들었다가 깨어난 아침의 맑고 상쾌한 기운이 하루의 시작에 큰 힘을 주어 행복하다.
나를 아껴 주는 주위 사람들이 궁금해서 제일 많이 묻는 말들이다.
“왜 이리 먼 데서 살고 있는가? ”
“외롭지 않은가?”
“사막의 더위를 어떻게 견디며 살 것인가?”
나는 아무런 회한도, 유혹도, 미움도 없는 혼자서, 혼자만의 세계에서 그토록 사랑하는 나의 고독을 더 철저하게 길들이며 살고파서 라면, 웃음거리가 될까.
〈사막에서(1)〉
이곳의 여름은 말 그대로 화씨 100도를 넘나드는 용광로 안 같다. 후끈거리는 태양열로 온 자연이 타들어 가고 사람은 현기증이 나고 몸속 내장까지 다 태워질 것처럼 뜨겁다. 서울에 갔을 때 찜질방에서 마포 떼기 거적을 두르고 용광로 속에 들었던 그 화끈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동차를 바깥 주차장에 잠시 세워 놓고 상점에 들러 필요한 물품 몇 가지를 구입하고, 다시 자동차로 돌아오는 불과 10여 분 만에도 차 안의 열기는 핸들을 잡을 수 없도록 뜨겁다. 이곳에 이사 온 몇 달 동안은 너무 당황스럽고 가뜩이나 더위를 많이 타는 내가 정말 잘 적응할 수 있을지 두렵기도 했다. 이곳에서 여름 나기가 북극의 혹한을 견디는 것과 비교한다는 것이 가능하지야 않겠지만, 혹한의 겨울을 잘 견디면 따스하고 아름다운 봄, 여름을 맞이 할 수 있듯, 역으로 이곳에서의 혹서의 여름을 무사히 넘기고 나면 시원한 가을 바람과 맑은 햇살을 동반한 가을을 맞이하고 포근한 겨울이 다가온다.
가을 산들바람이 온 뜨락에, 거리에, 산과 들에 내려앉으면 이곳 사람들은 비로소 활기를 되찾고 운동을 시작한다. 이곳의 여름은 6개월쯤 지속되지만 겨울은 따뜻하여 화씨 80도를 오르내리고 있어서 몹시 추운 겨울을 보내야 하는 미국 동부지방과 캐나다 쪽에서 겨울을 피해 이곳으로 휴양하러 온다는 것을 알았다.
이 뜨거운 여름을 잘 견뎌내고 초월하여 아름답고 따뜻한 겨울을 공으로 즐길 수 있음을 알아가기엔 나는 아직은 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한 것 같다.
〈사막에서(2)〉
‘하늘이 활짝 열리며 불을 뽑는 더위의 고통을 겪어야 청명하고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할 수 있음과 같지 않을까….’
이곳에서의 처음 두 달은 현기증이 나서 외출은커녕, 뒤뜰에도 나가보지 못했다. 일 년 중 6개월이 뜨겁고 긴 여름이라니 아직 적응되지 않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 낯선 고장에서 살아야만 하고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여름 계절이 막 시작할 무렵 이 사막으로 옮겨 왔으니, 처음부터 이 장난 아닌 무더위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꼼짝없이 방안에 갇혀 지내면서 에어컨과 천정에 설치해 둔 선풍기를 적당한 온도에 맞추어 놓으면 그나마 숨을 쉴 수 있었다. 그래도 창밖엔 푸르디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가 사막의 바람이 야자수 잎을 흔들어대고 있는 정경에 마음을 줄 수 있는 것이 조금은 위안이 되지만 찬란한 태양은 방안에서 바라볼 수 있을 뿐 창문을 열면 열기가 얼굴을 확 지지는 것처럼 뜨겁다.
하루빨리 적응해서 내 새 삶을 시작하고픈 마음만이 앞서고 있다.
위의 카뮈의 말처럼…. 그래서 아름다운 가을을 맞이해야지….
〈사막에서(3) 〉
더위를 핑계로 내 소중한 시간을 그냥 흐르게 할 수는 없다.
남은 생애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 마음이 끄달려 부지런 떨며 현재의 위치를 정리해야겠다.
이 집을 지을 때 다행히 서재를 먼저 꾸며 놓았기에 책들을 정리하고, 화실로 쓸 공간이 생겨 이젤과 그림 도구를 풀어 놓는 등 정돈해 놓으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외출이 어려우니 방안에 갇혀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그림 작업을 시작하면서 더위가 지나갈 때쯤엔 몸과 마음이 안정을 찾게 될 것을 기대해 본다.
알찬 새 삶을 시작해야지.
더욱 나를 사랑하며 살아야지.
어디까지나 일방적인 것 어떤 고통이 와도 잠잠히 가라앉혀야만 한다. 삶의 무게가 고통에서 자유롭게 해 주는 말 한마디 그것은 사랑이다. -소포클레스
사막에서(4)
희망찬 하루를 시작하고파, 아침 일찍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조용한 아침입니다.
이럴 땐 종일토록 창 곁에 앉아만 있다가 하루해를 보내도 좋은 것 같습니다.
가만히 창밖을 주시해 보니, 어디서 왔는지 노랑나비 한 마리가 노란 꽃에 입 맞추고, 다른 꽃으로 옮겨 앉고 있습니다.
아, 조용한 아침! 허공이 다가가 야자수 잎을 흔들어 놓고, 다른 잎들도, 꽃잎도 제 스스로 흔들리며 깨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신비한 광경을 이 아침에 바라보고 있자니 마악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차츰차츰 마음이 안정되어 가고 있고, 이 낯선 고장을 나는 어느새 사랑하며 살아가고픈 마음이 솟아오르고 있습니다.
어느새 뜨거운 태양이 하늘 높이 오르고, 활기찬 하루의 시작이 되고 있습니다.
이 건강한 아침에, 건강한 생각을 하며 살아야지….
〈〉
산을 건성으로 바라보고 있으면
산은 그저 산일 뿐이다.
그러나 마음을 활짝 열고
산을 진정으로 바라보면
우리 자신도 문득 산이 된다.
-법정 스님
진하게 아침 커피를 끓여 큰 머그잔에 가득 담고 정말 오랜만에 편안한 마음으로 아침 식탁에 앉았다. 뒤뜰의 넓은 잔디 건너편에 길게 뻗어 누운 모래 산을,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자니, 법정 스님의 ‘산’의 위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산은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고, 나는 무심히 거기에 있는 산을 바라보아 왔는데, 한가롭게 앉아 그윽하게 산을 바라보고 있자니, 산은 금방이라도 내 온몸을 감싸안을 듯 창밖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지난겨울, 모처럼 한가로운 시간을 만들어 뒤뜰에 나가 긴 의자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해 질 무렵까지 산을 진정으로 보았던 적이 있었다.
무덥고 긴 여름 내내 누런 모래 산이 잠자듯 누워있는 것만 보아 오다가 그날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무렵 조용하던 산들이 일제히 깨어나 태양의 일곱 색깔로 변신하는 모습에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모른다.
평면으로 쭉 뻗어있는 줄 알았던 산이 선명한 석양빛에 겹겹의 모습을 드러내는 게 아닌가! 제일 가까운 산 뒤에 얼굴만 내민 중간 산, 높고 먼 뒷산들이 겹쳐 다양한 색채로 반짝이는 장관! 참으로 신비로웠다.
태양은 이처럼 모든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제빛을 발하며 살아 숨 쉬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새삼 경이로움으로 다가오고 그 아름다운 광채에 한참을 푹 빠져 있었다.
그 후 나는 내 앞에 펼쳐져 있는 산이 그저 잠자는 산이 아니고 화려하게 변신하는 살아 있음을, 힘찬 기운을 인간에게 쏟아부어 주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이 산을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얼마 전 친구 몇 명이 우연히 내 집에 들러 점심을 함께 하였다. 그리고 뒤뜰에 나가서 환담을 나누었는데 한 친구가 정오의 모래 산을 바라보면서 “저 산은 누렇게 꼼짝하지 않고 죽어있네.”라고 했다.
나는 피식 웃음을 참으며 “아무도 모를 거야. 저 산의 비밀을….”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기야 인생살이를 그렁저렁 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에는 자연의 신비로운 비밀을 어찌 알겠는가? 알려고나 하겠는가?
어느 날 스님 세 분을 정말 뜻밖에 모시게 되었다. 한 스님께서 먼 모래 산을 한참 바라보시더니 “거대한 사자가 길게 쭉 뻗고 누워 편안한 잠을 자는 것 같다.”라고 하셨다. 그러고 보니 누우런 빛깔 하며 완만한 산의 곡선이 고르게 흐르고 있는 게 거대한 사자의 등 줄기 같아 놀라워하며 공감했다.
그러나 산은 산이다. 그리고 살아 숨 쉬는 정겨운 산이다. 내게는 산의 속사정 신비로운 비밀을 알고 난 후부터는 나만이 즐기고 있다. 이 모래산 사막에서 사는 나는 자연이 주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들며 차츰 이 사막을 사랑하게 되고 적응을 잘하고 있다.
오늘, 지금 내 마음이 한가롭다. 평화로운 아침에 눈을 지그시 뜨고 새삼 내가 산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