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농인의 세계에서는 청인으로, 청인의 세계에서는 농인의 딸로
수어와 한국어 사이를 오가다 마침내 내뱉은 첫 번째 이야기
주변 어디에나 있지만 왠지 모르게 낯선 세계가 있다. 분명히 알고 있기는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본적은 없는 세계다. 이를테면 우리나라에서 태어난 한국인이지만 ‘한국어’가 모어가 아닌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겉으로 보기엔 무척이나 고요하고 적막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어느 곳보다 뜨겁고 시끌벅적하다. 바로 농인의 세계다. 이들은 한국어와는 다른 독립적인 문법 체계를 가진 ‘수어’로 소통한다. 이 나라의 모국어는 분명 한국어지만 이들에게만큼은 첫 번째 언어가 아닌 셈이다.
“코다라서 그래요.”
소리 없는 세상에서 울고 웃는 떠들썩한 일상 에세이
수어 통역사, 유튜버 그리고 이 책 『그 집의 언어』의 주인공이기도 한 유슬기 작가는 농인 부모님 밑에서 청인 아이로 태어났다. 이른바 코다(Children Of Deaf Adults)다. 집에서는 눈빛과 표정과 손짓으로 대화하고 밖에서는 한국어로 말한다.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을 대변하는 통역사 역할을 하게 되었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 말을 걸면 엄마를 대신해 대답하고 음성 안내만 존재하는 지하철이 갑자기 정차하기라도 하면 상황을 설명하는 것도 언제나 작가의 몫이었다.
그렇게 청인과 농인의 세계를 통역하며 살아온 작가는 정작 자신이 어디에 속해 있는 건지 오랫동안 알 수 없었다. 두 세계는 너무 달랐고 여기에 대해 알려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때로는 너무나 애틋한 마음에 눈물이 울컥 나오다가도 어떨 때는 알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오르기도 했다. 어느 때에는 너무 지쳐서 차라리 이 세상에 모든 소리가 사라지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아무리 괴로운 순간에도 불합리하고 불친절한 청인의 세상을 마주하면 도저히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에게로,
손끝으로 대물림되는 사랑의 형태에 관하여
부모님에게 세상을 통역하는 어린 어른에서 집안의 든든한 버팀목인 딸로, 수어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에서 모든 사랑을 내어주고 싶은 한 아가의 엄마가 되기까지, 작가는 몇 번의 쉽지 않은 탈피를 거치며 비로소 코다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이 청인도 농인도 아닌 ‘코다’라는 또 하나의 세상을 새롭게 마주한 것이다.
『그 집의 언어』는 바로 그 지점에서 농인과 청인을 다루는 평평한 이야기의 범주를 넘어선다. 그간 세상에 받아온 생채기와 자기만의 세계를 형성하며 거쳐 간 고민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솔직한 문장은 같은 일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더라도 경계인이라면 누구든 공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느새 작가를 열렬히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두 어떤 경계에서 갈피를 잃어버린 적이 있다. 홀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남겨진 막막한 심정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저 서로가 처한 상황이 다르고 각자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전투를 치르고 있어 전부 헤아리지 못할 뿐이다.
작가는 두 세계를 오랜 시간 배회하며 결국 나를 이루는 근간에는 “만약 네가 아기를 낳으면 너한테 못 해줬던 것들 네 아기에게 다 해줄게.”라고 말하는 가족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에게는 매일 아침 하루를 깨워주는 엄마의 따뜻한 손길과 어떤 귀한 것보다 딸이 최고라는 아빠의 믿음이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큰 소리로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존재를 확인해온 다정함이 있었다. 그리고 작가는 확신한다. 이렇게 몸 안에 새겨진 사랑은 그렇게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에게로, 언어가 아닌 몸으로 전해진다고 말이다.
모든 경계인에게 앞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갈 힘은 사실 이미 당신에게 있다고, 아직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조용하지만 단단한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