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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
그 파란 차 | 그 당나귀 | 그 염소 | 그 구조물 | 그 구조물 | 그 아파트 | 시간 | 그 옷 | 그 단어 | “그 단어” | 그 입술 | 그 음악 | 그 영화 | 그 전시 | 그 바다 | 그 바다 | “그 바다” | “그 바다” | 그 식탁 | 그 식탁 | 기차

2
그 복도 | 그 구조물 | 그 피아노 | 그 맥도날드 | 그 이념 | 그 언덕 | 그 야심 | 그 턱 | 그 벽장 | 그 벽장 | 그 욕조 | 그 사실 | 그 기원 | 그 아파트 | 그 트럭 | 그 책 | 그 도로 | 그 외곽 | 그 공장단지 | 그 공원 | 그 푸른 것 | 그 드라이브

3
그 요술 | 그 해 | 그 해 | 그 해 | 그 달 | 그 달 | 그 달 | 그 전생 | 그 영화 | 그 손목 | 그 역사 | 그 광주 | 그 실종 | 그 약속 | 그 꽃 | 그 자유 | 그 문 | 그 욕망 | 그 길 | 그 풍선 | 그 기억 | 그 커피 | 그 차 | 그 길 | 그 길 | 그 전생 | 그 전생 | 그 전생 | 그 전생 | 그 전생 | 사랑 | 그 폭력 | 그 모자

발문
시와 사랑과 자동차 · 김보경
저자 소개
저자 : 김유림
199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6년 [현대시학]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와 소설 등을 쓴다. 시집 『양방향』, 『세 개 이상의 모형』, 공저 『셋 이상이 모여』 이 있다.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똑똑똑, 한 남자가 다가와 당신의 방문을 두드린다. 전부 제자리에 넣어두고 오거라. 잘 시간이다. 설집 『갱들의 어머니』가 있다. 일인 출판사 ‘말문’을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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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고 쓴다.
그것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불가능성에 맞서는 기억의 발명기

④ 나는 뭔가를 보았다. ⑤ 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외곽 도시의 정경을 보았다. 을씨년스러운 복합 상가 외관을 보았다. ⑥ 흔들리는 나무를 보았고, ⑦ 사람이 거의 없는 공원을 보았다. ⑧ 노래, 노래를 보았고, ⑨ 들었고, ⑩ 착각했다. ⑪ 나는 광주에 간다고 생각했고, 광주에 갔다. 이윽고, 버스가 정차했다.
―「그 광주」 부분

“이것은 순서처럼 보이지만 순서가 아”니다. “순서였다면, 당신에게 혼란을 주지 않았을 것이다”(「그 롯데리아」). 시집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원 번호는 요소마다 차례를 배정하는 듯하지만 정작 화자의 발걸음은 그 수순이나 존재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 “나는 ③을 벗고, ④에서 내리고, ⑤를 무단으로 가로지르고, ⑥을 포기하거나 아예 ⑧ 또는 ⑨를 상상한다”(「그 음악」). 그렇다면 어째서 시인은 번호를 붙여 말하고 있을까?

미술사학자 언스트 곰브리치는 ‘경관의 발명’을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다. “알프스 경관은 산맥의 파노라마를 보여주는 회화보다 앞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발견된 것이다.” 이는 회화가 프레임 역할을 하는 창(窓)이라는 미학론으로 뒷받침된다. 그림 이전에 풍경이 존재할 수 없듯이, 기억은 기록을 통해 비로소 발견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거듭 밀어닥치며 시야를 가리는 이 장면들을 써내는 유일한 방법은 “단어의 정렬이나 번호 매김”으로 “유년의 길을 만”(「그 언덕」)드는 것뿐일지도 모른다. 기록은 출발점과 종착점 그리고 그들을 잇는 연속성을 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억을 기록으로 번안하는 김유림의 작업은, 곰브리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억의 발명’이다.

시인은 어떤 대상에 대한 기억을 “잘라서/납작한 것으로 만들”고 , “그것을 다시 말아서”(「그 전시」) 시를 짓는다. 그러나 기억에는 정해진 순서도 연속성도 없기에 차례는 지켜지지 않는다. 또한 지구본을 세계지도에 옮길 때와 마찬가지로, 평면화에 따르는 필연적 변질은 “①과 ②와 ③을 포함한 수많은 항목 중에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진실이 아닌지는 알” 수 없게 한다. “알지 못하지만······ 당신에게 보이기 위해서는 그것들과 내가 일종의 대열(隊列)을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그 공원」)기에, 시인은 거듭해서 이미지에 번호를 달고 디테일을 나열한다.

그렇게 각각의 탐구 과정은 기억의 성질을 환기한다. 예컨대 전혀 상관없는 두 대상을 한 곳에 수렴시키는 자력(“‘사모바르’를 좋아하기에 겨울이면 그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고, 그러나 겨울이면 그 옷 또한 떠올릴 수밖에 없기에 여기에 함께/나란히 둔다, 「그 옷」), 프루스트의 마들렌처럼 특정 대상으로 온갖 장면을 범람하게 만드는 기폭성(“창밖은 내 어린 시절. 내 아파트. 내 창고. 내 창고의 자물쇠. 그 밖의 내 것”, 「기차」), 미래의 시공간을 호출하는 힘(“그 바다로 가기 위해 속초 시내의 작은 횡단보도를 건너 흰색으로 칠한 콘크리트 벽으로 향할 때, ‘나’는 이미 그 바다를 본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 바다는” “그 벽 위에서 일렁이고 있을 것이다”, 「그 바다」, p. 57)이 있음을. 삶의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기억을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의 방식으로만” 볼 수밖에 없는 운명 아래서도 시인은 “그것을 붙들”어 “길고, 안정적”인 “풍경”(「그 외곽」)을 우리에게 보인다. 기억의 운용법을 다채롭게 선보이는 시집은 기어코 당신의 우물에도 마중물을 붓는다. 차창 너머로 몰려드는 풍경처럼 기억이 흘러넘친다 해도, 부디 놀라지 말길.

흩어지고 뭉개지는 기억 속에 팔을 뻗어
‘너’의 손을 붙잡기 위한 이 모든 “탐구”

난 내게 가장 생생한 실감(의 측면)을 이용해 ①과 ②와 ③을 끌어당겨서 한데 묶으려고 시도하지만, 잘되지 않는다. 그런데 그것―한데 묶이지 않으면서도 한데 몰려다님―이 바로 염소라는 개체의 특징이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되면서 그런 시도는 더는 하지 않아도 좋게 된다. 이것이 바로 통합이고, 끝인 것이다. 예컨대, 나는 그저 그중 그때그때 가장 사랑하는 염소를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말이다.
―「그 염소」 부분

거듭되는 탐구는 피할 수 없는 모순을 드러낸다. ‘그것’들은 어떻게 같은 것으로 묶이는가. 그러나 왜 결코 두 번 다시 같아질 수 없는가. 화자는 “여태 지나쳐 온 모든 차를 떠올린다, 지나쳐 간 모든 차도. 그러나 그들은 너무 많아서 하나이지 않다. 하나가 아니다”(「그 파란 차」). 어제 본 차가 다르고, 오늘 본 차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했던 차와 미술관에서 관람한 영상물 속 차는 기억 속에서 늘 한자리에 놓이고 만다. “①과 ②는 스스로, 알아서, 뒤엉킨 것이다. 누가/먼저랄 것도 없이,/그/음악으로”(「그 음악」). 때로 그들은 별개고, 때로 그들은 하나다. 이 모순을 어떻게 헤아려야 하는가?

시인은 그 답을 선취한 듯하다. 그는 두번째 시 「그 염소」에서부터 “그것―한데 묶이지 않으면서도 한데 몰려다님―이 바로 염소라는 개체의 특징이라는 걸” 깨달으며 “나는 그저 그중 그때그때 가장 사랑하는 염소를 생각하면” 된다고 안도한다. 하여 우리는 이 시집을 시인이 “여태 지나쳐온 모든” 대상의 모습 중에 “그때그때 가장 사랑하는” 이미지를 떠올리는 과정의 집약체로 읽을 수 있다. 사랑하기, 그것은 곧 차별하는 일이다. 김유림의 시에서는 한데 묶이려는 일반성을 무릅쓰고 기억 속 고유한 ‘그것’의 이름을 달리 발음해보려는 시도를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그것이기에 소중하다”(‘시인의 말’)는 마음으로, “그 푸른 것은 그 푸른 것과 다르지 않고” “푸른 것과 같지도 않”음을 알지만 “푸른 것을 푸른 것이라”(「그 푸른 것」)고만 불러보는 일.

무수한 불가능성 속에서도 기억을 톺아내려는 실험은 곧 ‘나’를 찾으려는 고투와 같다. 한 영화가 말했듯 ‘기억이 환상과 동의어일지라도 인간은 기억으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환상”(「그 공원」)이라는 시구를 ‘나는 나의 기억’이라는 말로 읽을 때, “환상이 사실을 증식하듯 증식하는 경로를 따라가는 경험”이라는 문학평론가 김보경의 문장은 『탐구』에 대한 독해를 넘어 살아가는 일 전반을 일컫게 될 터이다. 그런 한편, 갖은 기억을 집어 들고 살피던 와중에도 시인은 ‘너’를 발견하는 즉시 “달려가면서 재빨리 그것들을 어두운 옷 주머니에 쑤셔 넣을” 각오를 한다. “두 손으로” 너를 “안을 수 있도록 말이다”(「그 기원」). 평단에서 빈번히 짚어왔듯 김유림의 시 세계를 추동해온 유구한 힘은 ‘그리움’이다. 이번 시집에서도 시인은 어김없이 “오랫동안 너를 그리워”하며, 기억을 더듬어 발견해낸 ‘나’를 “지켜보고 웃는 이가 있다면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그 구조물」)한다. “늘 그 주변을 얼쩡거”리는 그의 서성거림은 “늘 그곳에 가고 싶”(「그 맥도날드」)어서 “너에게로 가는 유일한 통로”(「그 언덕」)를 찾으려는 마음의 구현이다. 그리하여 결국 이 모든 탐구의 목적은 ‘나’를 거쳐, 그리워 마지않는 “너를 만나러”(「그 벽장」) 가기 위한 것이다. 그 끝에 존재하는 “너의 손을 잡”(뒤표지 글)으러. 너에게.

시인의 말

그것은 그것이기에 소중하다.

2026년 4월
김유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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