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추상적 이론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방향을 바꾸는 포스트휴머니즘
『미로에서 출구 찾기』는 『철학적 포스트휴머니즘』에 뒤이어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페란도의 저서이다. 세계적 석학 로지 브라이도티의 제자이기도 한 프란체스카 페란도는 포스트휴먼 시대를 구상하는 학자, 예술가, 과학자, 연구자 등의 플랫폼인 ‘글로벌 포스트휴먼 네트워크’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TED에서 최초로 포스트휴머니즘에 관한 강연을 진행하는 등 포스트휴머니즘 분야를 선도하고 있다.
페란도의 이번 책 『미로에서 출구 찾기』는 개념을 정리하고 논증을 쌓아가는 전통적인 이론서의 형식을 따르기보다, 독자가 스스로 사유의 흐름에 들어가도록 이끄는 실천적 텍스트에 가깝다. 여덟 가지 명상, 짧은 단위의 사유, 반복과 변주로 구성된 이 책은 독자가 스스로 생각하고 감각하며 깨닫는 과정을 경험하게 한다.
인간이 오만을 내려놓고 겸손해질 수 있는
사유 연습의 장(場)
이 책에서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끈질기게 제기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실존적 질문은 포스트휴머니즘 이전에도 존재했던 오래된 질문이다. 해당 질문이 사뭇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는 것은, 페란도의 관심이 고정된 자아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페란도는 인간을 다양한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구성되는 존재, 즉 ‘일자(一者)이자 다자(多者)’로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므로 “나는 누구인가?”는 ‘나’에 갇힌 유아론적 질문이기보다는 관계성 속에서의 ‘나’를 파악하기 위한, ‘일자이자 다자’로서의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질문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인간을 다른 존재들보다 우월한 위치에 두는 사고에서 벗어나, 인간-비인간, 기술-생명, 자연-문화가 서로 얽혀 있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자신을 다시 바라보게 만든다. 세계와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의 전환을 요청하는 페란도에 따르면 ‘포스트휴먼으로 존재하기의 기술’이란 (어쩌면 소박하게도)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것이다.
일자이자 다자로서의 우리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게 되었을 때, 그 앎을 여러 가지 삶의 영역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이야말로 중요해진다. ‘습관’대로, ‘관습’대로 살아서는 미래를 바꿀 수 없다. 페란도는 구구절절 구체적 행동 강령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인간이 오만을 벗어던지고 겸손해질 수 있는 사유 연습의 장을 마련한다. 인류 스스로 망쳐 놓은 세상 속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답을 알 수 없어 막막한 사람들에게, 급진적 사유를 실천으로 옮기고 싶은 독자들에게, 『미로에서 출구 찾기』는 중심을 잃지 않고 나침반 역할을 해줄 것이다.
인류세의 미로를 탐방하는 이에게
하나의 나침반이자 길잡이가 되어줄 책
이 책은 여덟 개의 ‘명상’과 하위 해시태그로 구성되어 있다. ‘나’라는 개인적 질문에서 출발해 종과 행성, 그리고 사회적 존재로까지 시야를 확장해 나가는 하나의 사유의 흐름을 이룬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독립된 개체가 아니라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존재로 재정의된다. 첫 번째 명상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개별적 차원이 아닌 관계적 차원에서 다시 사유하는 데서 출발한다. 이어지는 두 번째 명상에서는 보노보와 침팬지 같은 우리의 유전적 친척들을 살펴보며 인간이라는 존재를 새롭게 위치 짓는다. 세 번째 명상은 “우리는 종으로서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야를 확장하고, 네 번째 명상에서는 인간을 지구와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행성의 일부이자 기술로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이러한 사유는 다섯 번째 명상에서 “우리는 행성으로서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며, 우주적 차원의 자아와 윤리를 탐색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여섯 번째 명상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무엇이 될 수 있는가?”라는 가능성의 질문으로 전환된다. 일곱 번째 명상은 사회적 인식의 필요성에서 출발해 “우리는 사회로서 누구인가?”를 묻고, 마지막 여덟 번째 명상은 매 순간 우리 자신을 재발명하는 법을 사유하게 하며 책을 마무리한다.
편의상 순차적으로 책의 내용을 소개했지만 이를 따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다. 이 책은 제시된 순서대로의 독서를 고집하지 않아도 되고 자유롭게 탐방이 가능한 구조이며, 독자가 각자의 방식대로 의미를 발견하도록 설계되었다. 어떤 순서로 읽든, 어디에서 시작하든, 독자는 이 미로 속에서 자신만의 경로를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 길을 찾아가는 경험 자체다. 이 책은 독자에게 명확한 해답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복잡한 세계 속에서 스스로 방향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사유의 나침반이자 길잡이로 기능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 『미로에서 출구 찾기』는 스스로 하나의 미로이기도 하고, 그와 동시에 독자가 인류세의 미로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돕는 길잡이이기도 하다. 인간이 마주한 파국이 더이상 손쓸 수 없는 지경이라는 동일한 진단 하에서도 저마다의 처방이 갈리는 가운데 쉽사리 단순한 비관이나 허무주의로 빠지지 않는 자세가 얼마나 귀한지를 『미로에서 출구 찾기』는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