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농사는 결국 ‘기다림의 미학’이다”
텃밭에서 배운, 우리를 이해하는 가장 느린 방법
번아웃이라는 단어가 일상이 된 시대, 우리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성취하고 '완성'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잠시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일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곤 한다. 32년간 치열한 언론인으로 쉼 없이 달려온 저자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던 저자의 삶에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상실이 찾아온다. 고향에 계신 아버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이 책은 주인을 잃고 남겨진 고향의 밭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 얼떨결에 시작된 어느 초보 농부의 ‘5도 2촌’ 생존기에서 출발한다.
평일에는 회색빛 도심에서, 주말에는 흙먼지 날리는 강원도 영월에서. 저자는 낯선 밭일 속에서 숱하게 실패하고 넘어진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한 전원생활의 낭만을 이야기하는 농사 에세이가 아니다. 마음처럼 자라주지 않는 작물과 얄궂은 날씨 앞에서의 좌절은, 통제할 수 없는 삶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 준다. 무엇보다 땀 흘려 밭을 일구는 그 수고로운 시간은, 묵묵히 땅을 지켰던 아버지의 궤적을 더듬어 가는 먹먹한 애도의 의식이었다. 아버지가 남긴 낡은 일기를 넘기며, 저자는 무뚝뚝하게만 느꼈던 아버지를 가족이라는 틀을 넘어 '한 명의 인간'으로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이토록 묵직한 이별과 치유의 과정을 결코 슬픔에만 가두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자연의 섭리를 닮은 사계절의 흐름 속에서, 책은 끊임없이 생동한다. 작약과 참깨, 배추가 자라나는 경이로운 풍경 곁에는 뽑아도 끝이 없는 풀과의 전쟁 등 초보 농부의 좌충우돌 시행착오가 생생하게 펼쳐진다. 땀 흘려 수확한 재료로 뚝딱 차려내는 소박한 식탁은 지루할 틈 없는 유쾌함과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현대인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다정한 쉼터가 된다. 팍팍한 삶에 지쳐 마음 누일 곳이 필요한 독자들에게는 밭고랑 사이에서 피어나는 맑은 웃음을, 소중한 이의 부재를 겪은 이들에게는 상실을 따뜻하게 보듬는 애도의 시각을 건넨다. 더 나아가 언젠가 자신만의 단단한 삶의 방식을 찾고 싶은 이들에게 내면을 돌보는 ‘기르는 삶’의 눈부신 가능성을 보여준다.
흙을 만지고 계절을 견디는 시간은 바쁘게 질주하던 우리를 가만히 멈춰 세운다. 그 고요한 멈춤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잊고 있던 소중한 것들을 돌아보게 된다. 이 책이 건네는 담백한 진실에 귀를 기울여 보자. 우리의 삶은 단번에 '완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속도에 맞춰 '길러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책 속에서
농사는 풀과의 전쟁에서 싸워 승리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걸 여실히 알게 됐다. 무더위가 시작되자마자 풀이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했다. 뽑아도 뽑아도 풀은 계속 나왔는데, 체감상으로는 뽑자마자 그 자리에서 두배로 늘어나는 것만 같았다. 흰머리 뽑으면 두 개가 나온다는 속설처럼. - 34쪽
열매는 아무 말 없이도 자신을 증명한다. 복숭아는 달콤하고, 고야는 씩씩하며, 딸기는 사랑스럽다. 자라나는 모든 것은 개성이 있다. - 83쪽
웬만해선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던 투박한 아버지는 가족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을 일기장에 적어놓기도 했다. 매일 아버지의 일기를 조금씩 읽으며, 시골을 오가면서 농사를 지으며 나는 이제야 비로소 아버지를 가족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100쪽
일자리를 나가서 하고서 담을 발라 보고서 내맞으로 건너가서 모래밭을 갈았는데 힘이 많이 들지만 하고 싶어서 땅의 애착심에서 나는 하고 있다. 바라는 것은 없다. - 2020년 3월 19일 맑음 (아버지의 일기 중에서) - 99쪽
일자리 하고 집안일을 보고서. 내맞밭으로 유박을 한포 지고 가서 아래 밭에 3포를 뿌리고 오디를 16K 주어가지고 와서 놓고서 송해씨의 죽음을 영화로 엮어서 하는 것을 보았다. 참으로 인생은 허무하다. 왜서 삶을 위해서 끝없이 싸우며 헤쳐 나가다가 아무것도 남김없이 가고 말까. 이것이 인생의 길이다. - 2022년 6월 8일 맑음 (아버지의 일기 중에서) - 102쪽
나는 매일 아버지의 일기를 조금씩 읽으며, 내가 매주 편도 2시간 30분 거리의 고향으로 내려가 텃밭 농사에 매달리는 이유도 깨달았다. 나에게 농사를 짓는 시간은 농사꾼의 딸로서 아버지를 애도하는 시간이었다. - 102쪽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농사는 풀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는데, 금세 또 다른 깨달음이 오고야 말았다. 깨닫고 싶지 않았는데 저절로 깨닫게 됐다. 다시 정의하건대 ‘농사는 날씨’다. - 117쪽
삶은 흙과 닮았다. 때로는 메마르고, 때로는 숨이 막히지만, 마음을 갈아엎으면 다시 길이 열린다. 아버지, 가족, 그리고 이웃과 나 사이의 따뜻한 이야기. 농사란 결국 사람을 짓는 일이다. - 150쪽
초록 잎들이 모두 떨어진 늦가을부터 감나무의 진가가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추풍낙엽으로 앙상해진 나무들 사이에서 감나무가 유일하게 붉은 감으로 세상을 밝힌다. 잘 익은 감이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풍경은 크리스마스트리에 달린 알전구를 보는 것만큼 포근하다. - 173쪽
비록 5도 2촌이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의 순환을 생각하게 된다. 자연은 생장소멸生長消滅한다. 내 눈앞에 있는 식물과 나무만 자연이 아니다. 나 역시 자연의 일부다. 자연의 순환을 돕는 것은 나를 돌보는 일이다. - 210쪽
농사를 짓기 전에는 사실 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씨앗을 뿌려놓으면 알아서 자라는 줄 알았다. 흙에 영양분이 없으면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내 입에 비타민이며 영양제를 집어넣는 것처럼 밭에도 영양제를 뿌려주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 236쪽
꽃씨를 꺼내 공책에 올려놓고 살펴보았다. 작은 것, 큰 것, 동그란 것, 납작한 것, 뾰족한 것, 둥근 것, 까만 것, 누런 것, 단단한 것, 푸슬푸슬한 것… 씨앗 하나에는 온 우주가 담겨 있다. - 25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