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저자의 말
이 소설은 우여곡절을 거듭했다. 2019년 여름부터 쓰기 시작했고, 오랜 세월 다듬었다. 제목도 자주 바꿨다. 첫 번째 제목은 ‘농광축이 김동창 뎐’이었다. ‘농광축이’는 ‘농’사도 짓고 ‘광’부도 하고 ‘축’산도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제 아버지, 어머니 이야기를 꾸준히 지지하고 응원해 준 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이 맛보았던 긍정적 흥미를, 미지의 독자님들께서도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다.
2026년 4월
김종광
책 속에서
이게 다 아버지 탓이에요. 제 소설의 절반이 아버지, 어머니 얘기 쓴 거잖아요. 제가 아버지 삶에 주눅이 들어서, 아버지 얘기만 쓰면 제 주특기가 발휘 안 되었다고요. 제 주특기가 해학인데 아버지 얘기만 쓰면 해학이 안 되고 막 이상하게 진지해졌어요. 강희맹의 『훈자오설』 비슷하게 됐다고요. 아버지를 무슨 성인처럼, 참된 농사꾼처럼 그리다 보니, 독자가 원하는 흥미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아요.
누가 내 얘기를 써 달라고 했냐? 언제 나를 미화해 달라고 했냐? 솔직히 내 얘기 쓰는 거 싫었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를 아는 척 함부로 썼어. 어이가 없었지만 아들놈이 먹고살아 보겠다고 아비를 팔아먹는 걸 어쩌겠느냐. 꾹 참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그래, 내가 흥미 없는 인간이었지. 내가 대체 흥미 있을 수 있는 인생이었냐? 나도 너처럼 부모 잘 만났으면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풍류 즐기며 살았겠지.
아버지 죄송해요.
그놈의 죄송하다는 소리 작작 해라. 원고 줘 봐라. 내가 읽어 봐야겠다.
흥미 없을 텐데요.
흥미 있게 바꾸면 되지. 아버지가 인공 지능이다, 간주해. 내가 읽으면서 흥미 있게 고쳐 주마.
정말요, 아버지?
그래, 살아서도 자식을 위해서라면 못 할 게 없었는데, 하물며 죽어서야 못 할 게 뭐냐. (11-12쪽)
말 잘했다. 그러니까 너는 농사를 책으로 배운 거다. 몸으로 배운 게 아니라. 내로남불 아니냐? 너는 신문과 책으로 세상을 공부한 자들이 실제 삶을 모른다고 무시하고 비난해 왔다. 넌 뭐가 특별나서 신문, 책 조금 봤다고 농사를 알고 농민을 안다고 자신하는 게냐?
조금 본 게 아니라니까요!
됐고, 정직해 봐라. 네가 진정 농사를 알아? 농촌을 알아? 사랑하는 것과 아는 건 다르다. 넌 농촌을 사랑하는지는 몰라도 알지는 못해. (36-37쪽)
“제가 어제 하루 일한 거 매형이 받아서 조카들 과자나 사 주슈. 지는 고향으로 돌아갈래유.”
큰매형이 혀를 찼다. “뭐여, 달랑 하루 일하고? 며칠만 더 일해 봐. 공장 일이 농사일 광산 일보다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될 겨. 내가 시골서 농사지을 때는 길이 안 보였다. 뭘 해도 도시는 길이 보여.”
“길이 보이고 안 보이고 간에, 답답해서 못 있겄슈. 저는유, 들판이 안 보이면 못 살어유. 저는 시골 천성인가 봐유.”
“대책 없는 놈 보소. 스물다섯 나이를 똥구멍으로 먹었냐? 남들은 다 도시로 기어 올라오는 판에 뭔 시골 타령여.”
무엇이 문제일까? 왜 남들 다 좋다는 서울에 정이 안 가는 것일까. 고향 땅에 부모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치만 형제가 있다. 형이 넷이나 있고 작은누나도 가까이 있다. 아버지 같은 도십장이 있고, 친구들이 있다. 기분이도 있다. 기분이? 걔는 왜 그리운 거지?
그때가 서울에서 살아 볼 것을 건성으로나마 갈팡질팡해 본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로 창은 고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살아 볼 탐심을 품어 본 적조차 없었다. (123-124쪽)
허무한 인생
살아 45년 세월은 흘렀건만 남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늙어 가는 마누라쟁이, 철부지 어린 삼남매. 이것이 나의 긴긴 세월 동안 발자취란 말인가. 유복한 가정들은 무슨 복이 많아서인지 노력 탓인지. 노력이라면 나도 남한테 뒤지지 않건만. 이것도 하늘의 장난인가. 기구한 운명의 장난인가. 큰 고생을 하고 자라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복스럽게도 살지 못한 이 인생. 남처럼 휴식 한 번 갖지 못하고 남처럼 호강 한번 못 시키는 이 인생아. 늙어 가는 아내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슨 말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이 허무한 인생이 마음까지 좀먹어 가는 것일까. 아니면 세월 탓일까. 괴로운 심정 씹다 보면 병이 되니 가슴만 답답하구나. (211쪽)
큰애의 두 손을 꽉 움켜잡았다. 고개를 숙이고 뇌었다. “고맙다, 고맙다, 참말로 고마워.”
창은 자기 입에서 그런 말이 나갈 줄은 몰랐다. 녀석도 아버지가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지 멍청한 얼굴이었다.
참말로 고마웠다. 큰애가 대학에 붙고 말고가 자기 운명을 결정짓는 일처럼 사료되었다. 그때까지 살아 온 이유가 오로지 큰애의 대학교 합격이었던 것처럼, 백치가 돼 버렸다.
아무리 되새겨도 되게 부끄러운 순간이었다. 어떻게 자식 놈 앞에서 눈물을 흘려. 고맙긴 뭐가 고마워. 아비한테 그 정도는 해 줘야 자식이지. (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