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한 사람의 생애는 시대의 강물 밑바닥을 온몸으로 짚어가는 도정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위대한 서사이다. 해방 전후와 한국전쟁, 그리고 미증유의 경제도약기를 살아냈던 세대에게 있어 특히 그 서사의 농도가 얼마나 짙고 비장한 것일지는 상상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인자 시인의 시는 회상의 화법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회상은 단순히 과거를 떠올리는 것만이 아니라, 삶 전체를 이해하면서 축적된 경험들을 지혜로 승화시키는 과정이다. 하이데거는 휠덜린의 시를 논하면서 회상이 단순히 기억하는 의식의 작용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을 다시 생각하는 것, 존재가 처음 열렸던 순간을 되새기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회상하기는 사유하기이며, 존재의 근원을 향해 다시금 사유하는 존재론적 행위인 것이고, 이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미래로 존재를 밀고 가는 세찬 발걸음인 것이다.
이인자 시인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자신의 삶을 새롭게 해석해 나간다. 그것이 잔혹한 전쟁과 살육의 경험이든, 목가적 기억이든, 회상을 통해 화자는 새로운 자신,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려 한다. 이인자 시인의 시를 읽고 있으면 한국현대사의 뼈아픈 마디들이 돌올하게 만져진다. 더욱이 여성으로서 감내해야 했던 거친 고난의 세월 또한 선연하게 그려진다. 이런 점에서 이인자 시인의 시들은 시의 가치와 문학의 위의를 다시금 우리에게 보여준다. - 장수철(시인, 문학평론가)해설 중
시인의 말
1953년 중학교를 들어갔다. 그 해 겨울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 어려운 시기를 견딘 것은 독서의 위로였다고 생각한다. 인천 싸리재를 오르는 길가에 몇몇 책방이 있었다. 주인의 눈치를 살피며 잡지나 시집을 읽었다. 일기를 쓰며 빌린 책을 읽는 것으로 마음을 다독였다. 무엇인가 읽고 쓰던 버릇이 교직생활에서도 도움이 되었다. 노래를 부르고 가사를 쓰고 이야기를 만들고 아이들과 춤추는 시간이 즐거웠다. 문학이, 예술이 주는 위로와 행복이 내 곁에 있어서 어려운 고비도 넘기고 산 것 같다. 이제 늦은 나이에 모자라는 시를 묶는 복을 받는다. 교직생활을 마치고 쓴 시, 누구에게 보여주지도 못했는데 시집을 펴게 되니 부끄럽고 또 부끄럽다. 자식들과 지인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책 속에서
오랜 세월 앓고 있어
눈 퀭하고 앞섶 벌어져 있다
찬바람 몰아쳐도 여밀 수도 없다
가끔 시궁쥐가 찾아와 먹을 것을 찾지만
빈손이다
동굴처럼 외로워 거미줄만 흔든다
된장찌개 냄새를 기억하는 연탄아궁이
부뚜막의 따스함으로 궁핍을 잠재우던
빛나던 날들의 기억으로 버텨온 것
사랑이라 했던가 그러나
거들떠보는 이 하나 없는 수모
허망의 늪에서 벗어나 눕고 싶다
오만으로 등 돌린 그 앞에
와르르
천둥 치듯 무너지고 싶다
-빈집 1
날된장에 밥을 먹는다
옹기 안에서 곰삭은 세월만큼 부드럽게 풀린
황금같이 빛나는 된장
마늘도 파도 고추도 밀치고
된장만으로 밥을 먹는 이 더운 날
날된장에 보리밥 한 덩이
설움처럼 씹던 여인네
비단치마 잘잘 끌지도 못하는 시앗살이
그만 팔자 고치라면
그래도 사람이 어떻게 그래요
그렁그렁 눈물 지으며
오지 않는 남자를 기다렸다던 여자
그 여자 떠난 후
나도 날된장을 먹는다고
가난을 추억으로 삼키던 어머니
날된장 앞에서
서른다섯 생애의 어머니와
옛 여인들의 쓸쓸한 사랑법을 생각한다
가난의 늪에서도 찌들지 않는 추억 한 자락
고향집 부뚜막에 깃든 따스함으로
삶의 뒤안길에 묻힌 흐린 묵화 한 폭
맑은 바람인 듯 아릿한 눈물인 듯 다가오는
달콤하고 간간한 생의 밑반찬
-날된장에 밥을 먹으며
산골 사는 나는 잠이 많다
TV 뉴스 보다가
잘난 도둑 짓거리 보다가 어느새 잠든다
분노도 아픔도 없이 오직 깊은 잠 잔다
깨어난 새벽
창밖에는 밝은 달
노오란 낙엽송도 밤새 지켜보는데
부끄러워라
잠에 취함
잊고 잃고 버리고 흘리고
흐늘흐늘 떠밀리며 살아가는 나날
분노의 칼날 퍼렇게 갈며
불꽃 같은 열화 터뜨리며
한밤 지새며 맞아야 할
이마 가득 서늘한 여명을
황금빛 침으로
두터워진 각질 깊이 뚫어
붉은 피 솟구칠 일이다
밤새 죽비로 어깨 맞으며
꼿꼿이 앉아 소금땀 흘릴 일이다
산골 사는 나는
부끄럽게도 잠이 많다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