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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시인의 말

1부
흑색 소음
소바
소량 현실
우주 조류
스트로베리 문
새
씌어진 새
거칠고 들쭉날쭉한 점들
머루

2부
두 편의 삶
코다
여름 판타지
평대 해변
고독의 끝말은 숲
평대 해변
여름 이야기
요가 교실
플레이리스트
해변의 소년들
이 여름
코다

3부
미지의 빛
무저갱
잠실
빛을 등지고 올라가는 계단
호호 불며 먹기
육각형
유기체의 사랑
설탕과 눈송이
구름의 베어링

4부
사구; 또는 사건의 지평선
언데드
언데드
언데드
암흑 사이
샤이닝
샤이닝
호수 산책
언데드
언데드
샤이닝

5부
린네의 모자
플랑크톤
종의 기원
종의 기원
종의 기원
푸가
종의 기원
죄와 종
결손
종의 기원
종의 기원
크리스마스 판타지아
비인칭 미래 시점의 일

해설
읽지 않은 메시지1·소유정
저자 소개
저자 : 하재연
시인이며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 전공 교수이다. 시집 『라디오 데이즈』, 『세계의 모든 해변처럼』, 『우주적인 안녕』, 산문집 『내게 와 어두워진 빛들에게』, 시론집 『무한한 역설의 사랑』, 연구서로 『근대시의 모험과 움직이는 조선어』, 『문학의 상상과 시의 실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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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최선의 세계는 어디 있을까?”

비선형적 시간을 타고 겹쳐지는 목소리들
‘너’와 ‘나’의 우주가 공명하는 낯선 멜로디

불가능한 날개를 달고 사랑의 궤적을 그리는 하재연의 네번째 시집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데뷔한 하재연의 네번째 시집『인간이라는 환상처럼』이 문학과지성사 시인선 634번으로 출간되었다. 세번째 시집 『우주적인 안녕』(2019)을 출간한 이래 7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우주적인 안녕』으로 2020년 제3회 영남일보 구상문학상을 수상하며 “사라짐과 어긋나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열어가며 우주적으로 확장해, 인간을 성찰하는 개성적인 시선을 보여준다”(심사위원 최정례·조재룡·이경수)는 평을 받은 시인은 진지하고 섬세한 사유로 빚어낸 시편들을 장고의 시간 속에 담갔다 세상에 내놓는 중이다.

비선형적 시간을 타고 다시금 만나는 ‘우리’. 먼 곳의 별처럼 사이를 두고 동떨어진 ‘너’와 ‘나’를 깊은 고독에서 꺼내어 부드러운 언어로 잇는 시인의 목소리는 처음 듣는 음악처럼 새로워 오랜 여운을 남긴다. 드넓은 우주처럼 고요하고 심원한 시 세계를 펼쳐 보이며 미래를 향한 간절한 희구로 써 내려간 시 54편을 총 5부로 나눠 묶었다.

지나간 것과 오지 않은 것, 잃어버린 것과 우연히 흘러오는 것 들이 잠시 겹쳐지는 장소인 ‘나’. 그것들의 마주침은 환상과도 같지만, 바로 그 환상으로 우리는 아직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 여러 갈래의 다양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이 시집에서 끝내 열어 보이는 미래는 필연이 아닌 “우연의 미래”다. 그러나 우연은 어쩌다 혹은 아무렇게나 흩어지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있었으므로, 누군가가 묻고 또 누군가가 물음에 응답하려 했기 때문에 가까스로 도달할 수 있는 미래다.
―소유정 해설, 「읽지 않은 메시지 1―우연한 미래로의 초대」에서

시공간 너머 우연한 만남에서 전송되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의 미래

음악은 선처럼 흐르지 않는 것이다.
너의 목소리는 수년 후에야 비로소
비과거적으로 돌아오고야 마는
빛살이 나의 귀를 뚫는 오후
―「플레이리스트」 부분

“슬픔 이후 종말 이후 재앙 이후/살아남아” “지속될 수 있다는 것만이/우리의 믿음”. 시집의 첫 시 「흑백 소음」은 어둡지만 끈질기다. 마음에 불안을 일으키는 세계의 소음이 덮쳐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이 목소리는 어떤 결단처럼 읽힌다. 눈과 마음 그리고 ‘나’였던 생각을 가린 채 보고 듣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어지는 시편들은 여리지만 때때로 우리의 삶을 부드럽게 다독이는 장면을 그린다. “바람에 종이 풍경이 흔들리고”(「소바」), “아름다운 동선을 지닌 새의 시뮬레이션이/푸른 하늘을 너의 마음속에 가져다 놓는다”(「우주 조류」). 주체의 이 의미 없음, 의지 없음을 드러내는 움직임은 불현듯 ‘나’의 어둠을 파고들어 눈앞에 전혀 다른 세상을 펼쳐놓는다.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떠도는 “우리 안의 여린 박자”는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의 미래”(「소량 현실」)가 된다. 낯선 ‘너’와의 조우는 당장이 아니더라도 먼 훗날 기억을 일으켜 ‘나’의 입술을 열게 하는 새로운 언어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이처럼 하재연의 시에는 ‘너’라는 분명한 대상이 있지만 심리적 투사나 자아분열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라 생명 공동체적 시선에서 포착되는 것이며, ‘나’와 함께 우주적인 삶의 활로를 찾는 동행이다. “너를 발견했으므로/나는 이쪽의 문을 연다”(「새」)라는 시구에서 보듯 건물에 갇힌 새를 발견하고 출구를 열어 보이는 ‘나’가 있다. 그러나 “나는 너의 미래와 이어지지 않는 길로 접어든다”(「사구; 또는 사건의 지평선」). 하재연의 시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연대성은 존재들이 공명하되 선형적 시간을 따라 서로의 삶에 일관되게 개입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연히 만나게 되는 ‘너’와 ‘나’는 한 공간에 있지 않을 때도 있고 같은 종(種)이 아닐 때도 있으며 각자 다른 시간에 놓여 있기도 하다. 주어진 경로를 이탈한 그들이 진심을 다해 나누는 것은 존재가 지닌 근원적인 아픔과 슬픔이다.

시의 화자는 유리문 바깥에 펼쳐진 봄, 유유히 흘러가는 목장의 구름과 바람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기보다 “바깥의 아카시아 나무들로부터/가두어진 너의 팔딱이는 가슴팍을”(「씌어진 새」) 본다. “인간의 복식을 위해 품종이 개량된 양은 제 살집보다 더 무거운 털을 두”(「코다―구름과 바람의 현상학」)른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발생한 슬픔을/발생하지 않은 슬픔으로/환원할 수가 없”(「암흑 사이」)어서 “서로에게 귀 기울이는 당김음이 되”리라는 결심으로 영혼을 깨운다. 화자의 이러한 태도는 미지에 맞서는 확률 실험과도 같다. 하재연의 시는 ‘모든 개체는 죽지만 생명은 이어진다’는 단정한 진실을 끝내 놓지 않는다. 인간을 벗어난 자리에서 비로소 인간다움을 생각하며 서러운 존재를 끌어당기는 이 장력을 ‘사랑’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사랑이 다다른 곳에선 “우주에 서식하는 새들이/없는 날개를 꺼내//날아오르고 있다”(「소량 현실」). 빛을 좇는 ‘너’의 궤적을 기록하기. 이것은 곧 ‘나’의 생존을 위한 실마리가 된다.

동시다발의 우주적 탄생을 목격하며
비-인간의 자리에서 품는 인간의 마음

내 흐릿한 반영들이
호수 표면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궁창의 뚫린 구멍으로
눈이 내리고 있습니다.

하늘 아래 흘러가는 나의 삶과
하늘 위에 발생하지 않은

너의 삶 사이에서
―「종의 기원―인간 시점」 부분

“어떤 삶에 개입하는 순간/재이의 시간의 틈새가 계속해서 벌어지기 시작한다”(「샤이닝」, p. 93). 시간의 틈새로 보이는 것은 때로 목격하기 두려운 장면이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생명들. 끝끝내 울음을 끌어내는 것들. 그러나 울음이 멎은 후 틈새로 쏟아져 내리는 것은 눈부신 빛이다. 찰나의 스침으로 ‘연속 재생되는 목소리’에 이끌려 ‘나’는 사랑이 만든 길로 나아간다. 그것은 곧 ‘나’의 미래가 된다. 어둠을 통과하며 “겨울과 봄 사이에 생겨난 계절의 이름을/붙여”(「암흑 사이」)주고 “기도하듯/배고픔을 쪼개 다른 배고픔에게 나누듯이”(「샤이닝」, p. 90) 띄엄띄엄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 그 사이에 어떤 존재는 사라지고 흩어지지만 “빛의 태엽을 돌”(「코다―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엽서」)려 현재에 영사되어 누군가의 삶의 일부가 된다. 그렇게 “너를 만나기 전의 삶으로 다시는/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시간이/나에게 온다”(「샤이닝」, p. 103). 하재연의 시 세계는 “희미한 것들이 아주 많이 떠”(「종의 기원―찰리 찰리 챌린지」)도는 세상에서 혼자가 아니기를 택함으로써, 떠도는 말과 혼의 안녕을 빌며 멸종이 아닌 재생을 꿈꾼다. 그리하여 시인의 언어는 천천히 영원에 가까워진다.

시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소유정의 말처럼, 하재연의 시는 “중심의 언어로는 포섭되지 않는 존재들이 서로를 감지하고 호출하는 장소”와 “하나로 수렴되지 않는 비동일성 속에서 느슨하고 지속적인 관계를 형성하다 잠시간 마주치고 반가워하는 일”을 그린다. 알 수 없는 미래에 기대어 ‘너’에게 한 걸음씩 다가가보는 일, 쉼 없이 살아 움직이며 ‘너’를 기다리는 일. 비선형적 시간 속에서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괜찮아?//한 아이가 물어올 것이고/그것을 위해/나는 사랑을 하였습니다”(「비인칭 미래 시점의 일」).

시인의 말

당신 안에서 피로써 흘러나온 고통이
하늘로 올라가 눈송이가 되어 내린다.

그 눈이
당신을 솜이불처럼 덮어

부디,
없는 꿈과 같이
편안하게 잠들 수 있기를.

2026년 5월
하재연

뒤표지 글(시인의 산문)

없었던 우리, 없는 우리, 없을 우리에 대해 생각해본다. 생각의 끝까지 따라가면 없었던 우리가 조금쯤 있었던 것 같고, 없는 우리가 생겨나고 있는 것도 같다. 없을 우리 뒤에는 무엇이 있는지 모른 채 나는 살아가고 있다. 그렇다면 가능한 것들은 무엇일까. 만남. 만남들?

건물로 들어온 새 한 마리를 마주쳤다. 있어야 할 세계를 찾지 못해 계속해서 날갯짓하는 새. 그 뒤를 무한히 쫓으며 창문을 여는 사람. 그리고 날갯짓의 뒤에 남겨진 열린 창문들. 이런 엔딩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지의류는 균류와 조류가 만나 공생하는 생물이라고 한다. 툰드라와 사막은 물론, 우주 공간에서조차 살아남아 지구로 돌아와 다시 성장했다는, 1년에 겨우 1밀리미터 남짓 아주 느릿하게 자란다는 이 공생 생물체는 인간 이후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의 마음에는 수시로 구멍이 뚫리고, 거기로 왔다 갔다 하는 바람 소리를 듣는다. 그 소리는 NASA에서 포착했다는, 카시니 탐사선이 토성의 고리를 가로지르는 소리와 비슷하게 들린다.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계라는 한 철학자의 말에서, 나는 지의류의 성장을 상상한다. 가장 혹독한 곳에서 가장 느리게 그리고 함께 생장하기.

창밖에 비가 내리고 있다. 우주의 구멍에서 흘러내리듯이. 그 비가 당신의 검게 열린 눈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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