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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재고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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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제1부
십리는 길고·13/두양리 은행나무·14/추위를 옷소매에 붙이고·16/숭어가 있었대·18/해의 기분·20/개나리가 피었는데 개나리를 못 보고·22/그믐·23/명일 미용실·24/북천역에서·26/신촌 입구·29/귀뚜라미와 귀뚜라미·30/끝물의 은유·32/우수(雨水)·34

제2부
아멜리에·37/월운·38/민다리·40/평당·45/미나 양장점·46/전어는 며느리를 싫어하고·48/발꾸미 발꾸미·50/서촌구석몰길·52/이명산 약수·54/생선 말리기·56/생활이라는 나무·58/목련의 바깥·60/벅수·62

제3부
불가촉·65/지구를 한 번에 번쩍 닦고 싶어요·66/궁상각치우·68/율원·69/오늘의 언박싱·70/갑을병정·72/아무·74/오이디푸스·75/해바라기·78/대서(大暑)·79/모태·80/시계가 젖었다·82/저녁의 중심·84

제4부
수련이 흔들리고·87/겹·88/편의점은 많고·90/바람 찬 날에 꽃이여 꽃이여·92/십리사탕·94/불일폭포 앞에서·96/노량·98/이 집 왜 이래·100/비키스·102/윤달·104/사북의 비·106/문화동 블루스·108/소만(小滿)·110/미역 한 봉지·112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113
저자 소개
저자 : 석민재
부산에서 태어나 경남 하동에서 성장했다. 2015년 《시와사상》 신인상, 2017년 《세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엄마는 나를 또 낳았다』 『그래, 라일락』, 공동시집 『시골시인 K』, 산문집 『어쭈구리 야구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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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선명해지는 것들이 있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차마 이름 붙일 수 없었던 감정들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비로소 제 이름을 갖게 된다. 사랑 또한 그렇다. 어쩌면 사랑은 현재의 충만한 감정을 통해서가 아니라 지나가 버린 뒤에야 비로소 제 얼굴을 드러내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사랑의 순간에는 볼 수 없었던 것들, 너무 가깝기에 오히려 흐릿하게만 느껴지던 감정과 인식들은 회고 속에서 비로소 제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기에 사랑에 대한 시는 늘 알맞은 시간대로부터 살짝 비켜선 자리에 놓여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외려 선명해지는 것이 ‘사랑’의 감각이기에, 사랑에 대한 시는 늘 그렇게 살짝 늦은 시간에 도착하고 마는 것이다. 사랑에 대한 시가 찬란한 시간에 대한 역사이면서 쓸쓸하고 지난했던 시간을 그리는 작업이 되기도 하는 것도 같은 이유가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 대한 시란 시간이 흘러 비로소 제 모양을 갖게 된 기억과 감정들에 언어라는 몸피를 씌우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석민재의 작품 또한 그렇다.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 속에 놓인 ‘사랑’에 알맞은 언어라는 몸피를 씌우는 일. 어떤 의미에서 이는 시의 본령에 대한 충실성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친애하는 나의 애인들’이라는 표현처럼, 그의 시에서 화제가 되는 것들은 현재가 아닌 지나간 시간의 조각들이다. 과거가 되었기에 오히려 더 선명해진 감각으로, 그는 자신이 사랑한 것과 놓친 것, 견딜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해 쓴다. 바로 그 뒤늦은 앎의 자리가 석민재의 시가 출발하는 지점이다. 이 시집에서 사랑의 첫 얼굴은 봄과 벚꽃의 이미지로 나타난다. 하지만 그것은 밝고 환한 봄이 아니다. 「십리는 길고」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봄은 언제나 반쯤은 가짜라는 걸
벚꽃보다 상처가 먼저였다는 걸
아무도 몰랐던 거야
벚꽃 밟는 소리로 울고 부서지는 소리로 피고
어떤 사랑은 너무 예뻐서 계절을 망치지
기다리던 날에 비를 부르는 말이지
입 맞추기 직전에 돌아서는 뒷모습이지
말하지 않아도 될 말을 끝내 던져버리는
벚꽃은 순간인데 십리는 길고
사랑은 언제나 빨리 끝나고
벚꽃이 피어서 봄이 도망치나 봐
여름은 사랑의 마감일을 넘긴 채 기억을 되씹다가
혀끝이 쓰고
낙엽은 사실 벚꽃의 후회라는 것도 모르고
벚꽃보다 더 슬픈 눈이 내려도
다시 걸어도 십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넌 참 끝까지 아름답구나
넌 참 끝까지 아름답구나
- 「십리는 길고」 전문

이 시에서 봄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는 계절이지만, 그에 앞서 “벚꽃보다 상처가 먼저였다는 걸”이라 말한다. 이는 시집의 핵심적인 주제의식으로, 우리의 생각과 달리 ‘사랑’이란 순수히 아름다운 감정일 수만은 없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사랑은 늘 상처와 함께하며, 때로 사랑보다 상처가 우리에게 먼저 도착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쩌면 사랑이 피어나는 것은 바로 그 상처 위인지도 모른다. 다만 사랑하는 동안에는 그 사실을 모른다. 벚꽃이 피었기 때문에 봄이라고 믿고, 설렘이 있었기 때문에 사랑이라 믿을 따름이다. 이 시에서도 화자는 그와 같은 사랑의 진실을 시간이 지나고서야 알게 된 것으로 보인다. 벚꽃이 피기 전부터 ‘나’의 계절은 이미 무수한 잔금으로 채워져 있었으며, 그 안에는 이별의 그림자 또한 늘 함께였다는 사실. 사랑에 취해 있는 동안은 알 수 없는 사실들이다.
그가 “어떤 사랑은 너무 예뻐서 계절을 망치지”라고 말하는 까닭 또한 이러한 뒤늦은 앎의 문제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사랑에 취해 있는 동안, 계절은 그 자체로서가 아닌 사랑의 관점을 통해 다시 채색된다. 그렇기에 우리 기억 속에서 하나의 대상이나 사물 또한 그 자체로서 남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인식했던 순간의 감정과 감각으로 채색되어 남는다. 그 기억 속에서 벚꽃은 벚꽃이지만 더 이상 벚꽃만이 아닌 것이다. 어떤 표정, 어떤 말, 어떤 기다림, 어떤 돌아섬과 함께 기억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기억 속의 사물들의 모습인 셈이다. 그렇기에 사랑은 세계를 아름답게 만드는 동시에, 그 아름다움 때문에 세계를 견딜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사랑이 끝난 뒤에도 계절은 계속 돌아오지만, 한 번 사랑의 빛으로 물든 계절은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벚꽃은 다시 피어나지만 사랑은 다시 피어나지 않기에 아름다움은 아픔이 되고 슬픔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반복되는 생활의 틈에서 내가 지나온 슬픔과 농담, 체념과 사랑이 어떻게 함께 자라왔는지를 붙들어 본 기록이다. 나의 언어는 때로 거칠고 우스우며, 때로는 칼끝처럼 서늘하다. 그러나 그 끝에서 끝내 놓지 못한 것은 사람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었다.

책 속에서

오래 살아 멀미 나요
하루가 너무 많아 토할 거 같아요
하느님께 더 물어볼 말도 없는데
이렇게 늙으면 늙어간다면
눈가에 노을을 잔뜩 묻힌 채 미소만 짓고 있는 노인처럼
바다는
겨울에 자란다고 하던데
아!
말 대신 숨으로 발끝에서 불꽃이
탱고 같은 기분
이젠 꽃밭 가꾸는 일에만 전념하고 싶어요
자신으로 돌아와서
너무 오래 살아 그래요
쉽게 산모롱이를 돌아
후벼팔 절망도 없는데
풍년가만 불러서 그래요
가꾸는 식물마다
영광이래요
춤은 누가 보고 있나요
달 없이 무슨 유물로 이 우울을 달랠 수 있나요
- 「해의 기분」 전문

기린은 있다 기린은 있다가 아니라 기린이 있다 기린은 길다 길다는 말은 기린 쪽에 가깝다 기린은 위에 있다 위는 기린이 만든다 기린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것은 기린 때문이 아니다 기린은 계속 서 있다 서 있는 것은 움직이지 않는 것과 다르다 기린은 목이 있다 목은 기린보다 먼저 생각난다 기린은 멀다 멀다는 말은 눈에서 시작된다 기린은 있다 나는 아직 기린을 보지 않았다
- 「개나리가 피었는데 개나리를 못 보고」 전문

몇 번을 놓쳤는지
몇 사람을 떠나보냈는지

한때
앞줄에 서 있던 것들이
뒤로 물러나고
복숭아가 물러지고

끓일수록 줄어드는 장국
시간이 진하게 우러난 시간
관계가 줄고

함부로 대하지 않은 사람 몇
스스로 부끄럽지 않았던 순간
몇

다 읽고 덮은 책 위에 손 한 번 더 얹으며
말하다 만 사과를 다시 꺼내
이어 붙이려는 저녁의 대화

복숭아가 물러지고
아이를 재우고 돌아선 부엌
벌레에게 시달린 시간을 지나야 비로소
남는 이름
- 「끝물의 은유」 전문

이 세상은 움직이는 여자를 미쳤다 하고
움직이지 않는 여자를 죽었다 해요

바위 위에서는 바위로 모래 위에는 모래로
좋다 싫다 쉽게 말하지 않아야 오래 간대요

낙타가 바늘귀 들어갔다는데
나도 나를 잘게 썰어 보고 싶어요

혼자 밥 먹고 혼자 생각하고 돌아다녀요
세상을 이길 마음 전혀 없어요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말이 안 통하겠지만
멀쩡하게 방을 밀며 기어 다니고 싶어요

귀를 바닥에 착착 붙여
문장 읽듯이 세상을 파랗게 해독하고 싶어요
- 「아멜리에」 전문

함께 죽자는 말은 위험해
그만 죽자는 말은 더 위험해
살자는 말은 폭력이고
죽자는 말은 습관이지
오늘의 죽음입니다 개봉박두
어느새 내 방은 박스로 가득해
죽음이라는 말이 너무 자주 도착해서
택배기사도 이름을 외우네
물건처럼 굴러다니네
벽장에 넣고 사네 벽장이 너무 많네
사라지는 기술이 늘어나네
살고 싶은 건지
무해해지고 싶은 건지
에라, 나도 잘 모르겠네
살아 있는 것보다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게
더 편하다네
나는 웃네
옷장 속 바지처럼
영수증처럼
카톡방 알림처럼
무의미하게 지워지네 잘 지워지네
- 「오늘의 언박싱」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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