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해설]
사람 이야기, 글 이야기
-나태주 시인
1. 사람 이야기
나는 평생 초등학교 교직에 머물면서 시골 시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므로 외국 여행과 같은 여유 있는 삶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처음 외국 여행이 1994년 49세 때, 유럽 여행이었고 미국 여행은 2003년이 처음이었다. 재미 크리스천문인협회 초청으로 문학강연 차 수필가 정목일 씨와 함께 한 LA 여행이었는데 그곳에서 나는 아주 많은 교포 문인을 만났다.
그런데 그때 만난 문인들은 시인보다는 수필가들이 더 많았다. 초청해 준 중심 인사들이 수필가들이었기도 했지만 그만큼 미주 지역에는 수필 문학에 애정을 갖고 있는 쓰는 문인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렇게 만난 수필가 가운데 한 분이 이정아 선생이다.
이렇게 저렇게 만난 문인들 사이에 끼어 허방지방 지나온 이야기 하는 사이, 유독 이정아 선생이 유독 나의 뇌리에 들어왔고 관심이 가는 문인이 되었다. 첫 만남에서도 곧은 성격의 인물이었고 무엇보다도 글이 정직하고 분명해서 좋았다. 나의 문단 데뷔가 서울신문 신춘문예란 사실이 상호 간 더욱 친근한 마음을 갖게 했는지도 모른다.
알고 보니 이정아 선생의 부친이 바로 서울신문에 오래 재직하면서 일하던 언론인이었다. 성함은 임진수(林眞樹, 1926∼2001) 시인. 내가 알기로 임진수 시인은 참 맑고도 고운 시인이었다. 평안남도 진남포 출생으로 평양 제2 중학에서 수학하고 이미 북한에 거주할 때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시인이 되었고, 월남하여 잡지와 신문 편집일을 하는 분이었는데 정갈한 시를 쓰면서 일절 문단 정치와는 거리를 두면서 살았던 분으로 잘 알려진 분이다.
그런데 그분 따님 이름이 왜 임정아가 아니고 이정아일까? 나는 미국 사람들은 결혼하면 여자가 남편 성씨를 따른다는 걸 모르던 쑥맥이었다. 이런 오락가락 끝에 더욱 이정아 선생이 나에게 더욱 가깝게 심정적으로 다가왔다.
미국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책장을 뒤지니 오래된 시집 가운데 임진수 시인의 시집이 한 권 있었다. 1969년 삼애사란 출판사에서 나온 ≪아이들과 와라와라≫란 시집인데 성인의 시이면서 동심이 들어 있는 맑고도 정갈한 시집이었다. 임진수 시인이 낸 오직 한 권의 시집이었다. 어쩔까? 이 책을 내가 갖고 있는 것보다 글을 쓰는 따님이 보관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 다음 기회에 이 책을 이정아 선생에게 드렸다.
그러고 나서도 이정아 선생과 함께한 잠시의 인생 에피소드가 있다. 그것은 2013년 이정아 선생이 남편분의 신장을 이식받아 새 생명을 얻을 때의 일이다. 이정아 선생은 미국 생활 중 건강에 이상이 생겨 한국으로 잠시 귀국, 서울 아산병원에 입원해 치료받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죽을병에 걸렸다가 서울 아산병원에서 치료받고 회생했다는 얘기를 참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유독 나는 이정아 선생의 병원 생활이 궁금하고 걱정되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정아 선생의 병원 생활은 인내심이 요구되는 길고도 지루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꿋꿋이 견디며 건강을 되찾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더욱이나 자신의 신장을 기꺼이 아내에게 이식해 준 남편분의 지극한 사랑과 보살핌이 눈물겨웠다. 수술실에서 신장 적출 수술에 들어가면서 의료진이 어떤 신장을 떼어야 하느냐 물었을 때, 자신이 오른손잡이니까 건강한 오른쪽 신장을 떼어 아내에게 주겠다고 말했다니 세상에 그런 남편이 어찌 흔하겠는가!
2. 글 이야기
나는 사람과 글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예술 지상주의 같은 것도 있다고 그러지만 나는 인간과 글이 하나라는 생각을 굳게 믿는 사람이다. 일찍이 뷔퐁이란 프랑스 사람은 ‘글은 곧 사람’이라고 말했다는데 이 말보다 더 정확하고 정직한 말을 나는 이적지 들어 보지 못한다.
‘글은 곧 사람이다’라고 말할 때 이정아 선생의 글과 인간이 그렇다. 나아가 이정아 선생의 부친인 임진수 시인의 인간과 글이 먼저 그렇다. 그나저나 글을 쓰는 사람들 세상에도 가업(家業)이란 것이 있을 수 있다. 대를 이은 글쓰기 말이다. 어려서부터 글 쓰는 부형을 곁에서 보면서 자란 사람의 글쓰기는 그 기본적인 태도와 방향부터가 다르다. 그만큼 진정성이 있을 것이요 정성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이정아 선생의 글쓰기는 당신 혼자만의 글쓰기가 아니다. 어려서부터 부친으로부터 보고 배운 글쓰기이다. 그러니 그 글쓰기는 흐지부지 겉멋의 글쓰기도 아니고 여기(餘技)로서의 글쓰기도 아니다. 죽을 둥 살 둥 글쓰기요 오직 하나, 온리 원의 글쓰기인 것이다.
그동안 나는 미주 지역 문인들의 글을 보면서 현지화된 글쓰기가 무엇보다도 시급하다는 소감을 가진 바 있다. 몇십 년 미국에 살면서도 한국에 살던 이야기를 그리워하며 회고 일변도의 글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싱싱한 글, 실감이 들어있는 글, 현지 생활 체험을 글로 쓰자는 생각이 그것이었다. 이런 반성적 생각의 중심에 이정아 선생의 문장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이정아 선생의 글은 당신의 성격이나 인간처럼 솔직하고 담백하고 당당하다. 그래서 직선적으로 다가가 따가운 충고의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그로 하여 거짓된 우리의 삶을 거침없이 벗겨주면서 반성적 삶을 요청한다. 이러한 글 쓰기는 천성에서 오는 것이고 일단의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돈만 벌면 다라는 사람들은 세상에는 돈 이외의 질서가 있다는 것도 알아두어야 한다. 돈을 못 번 사람의 변명처럼 들릴지 몰라도 큰 부자가 못된 것이 억울하지는 않다. 적어도 나에게 맞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허세와 분수」 일부
Broken English나 Konglish가 내가 요즘 쓰는 언어이다. 남미 직원 통솔을 위해 남편은 Spanish를 하고 아들아이는 내게 한국어를 쓴다. 그러고 보니 죄다 완벽하지 않은 언어로 소통 중이다. 브로큰이 통하는 세상이 다행스럽다.
-<영어 울렁증> 일부
그다음으로 이정아 선생의 글은 잘 읽히고 쉽게 가슴에 와 닿는다. 문장이 정확하고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더러 산문을 쓰면서 나의 글에 요구하는 바가 있다. ‘바닥이 보이는 문장을 쓰자’라는 것이 그것이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게 횡설수설하는 글, 미사여구로 분칠 회칠한 글, 온통 잘난 척하는 글, 더구나 거룩한 척 거드름 피우는 글은 비위가 먼저 상할뿐더러 기껏 읽어보았자 가슴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꽃집 알바도, 세탁소의 옷 수선도, 인형 만들기도 기꺼이 해냈다. ‘기타 등등의 삶’으로 이미 단련된 마음의 근육이 아니던가? 돌이켜 생각해 보니 하나님이 예비하신 ‘기타 등등’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삶의 지경을 넓혀준 그늘의 체험이 살다보니 참 소중한 거였다. -<기타 등등의 삶> 일부
후배인 이숙영 아나운서가 사회를 보고 양희은 선배의 미니 리사이틀에 각 분야의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모신 동문의 밤이었다. 내 마음속에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던 모교가 비로소 따스함으로 마음속에 와닿았던 날이었다. 우리끼리의 말로 ‘가문의 영광’이라는 영매상이 좋긴 좋은가보다. 오랫동안 맺혔던 맘이 풀렸다.
-<기타 등등의 삶> 일부
이러한 글에서는 통쾌한 반전의 미학까지는 맛본다. 애당초 우리네 인생이란 지루하기 그지없는 반복(反復)과 병치(竝置)의 연속 같은 것이다. 꾸지꾸지하고 지리멸멸 그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한 번쯤은 반전(反轉)과 변용(變容)이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답답해서 못 산다. 바로 그것이다. 이정아 선생의 문장과 인생의 후반에 와서 이렇게 반정과 변용을 가져오면서 우리의 삶과 문장에서 쾌재를 요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이정아 선생의 글은 당신의 인생 역정의 기록이며 그 자체가 자서전(自敍傳)이라고 생각한다. 하기는 우리가 쓰는 글이 작게 보아서는 일기(日記)이고 길게 보면 자서전이고 일대기(一代記)인 것이다. 수필은 소설이나 시보다도 더욱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나 입장에 가장 가깝게 다가서는 문장이 또 이정아 선생의 문장이다.
앨범 속의 다른 이들의 근황을 묻고 이 일 저 일로 수다가 만발했다. 따져보니 제자는 19세 꽃띠였고 나는 28세 청춘이었다. 겨우 9살 차이 나는 스승과 제자는 이제 함께 늙어가는 중이다. 제자의 어머니는 생활관에 절 받으러 오셨을 때 나를 만난 적이 있다시며 말끝마다 “잘 가르쳐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여러 번 인사 하셨는데 매우 민망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사명감도 없는 엉터리 교사였는데 말이다. 거기에다 새파란 가정 선생이어서 한복을 입고 어른들 앞에서 예절 지도까지 하였으니 소도 웃을 일이다. 예의라고는 도무지 없는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몸 둘 바를 모르겠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날까> 일부
이상, 그야말로 주마간산처럼 이정아 선생의 글을 살피며 몇 마디 췌사(贅辭)를 달았다.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실례가 또 있을 수 있겠다. 글 읽는 분들도 두루 살펴 주시고 오직 이정아 선생의 글만을 중심으로 주의 깊게 읽어주시기를 바란다.
이정아 선생님! 우리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산 세월이 제법 오래입니다. 직접 얼굴을 대하지 못하고 살았으니 그동안 서로 변해 버린 얼굴을 확인하게 된다면 수월찮게 놀라고 낯선 느낌이 들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글로서는 서로가 충분히 소통하며 가까이 숨 쉬며 살았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라 여겨집니다. 부디 평안하시기를 바라옵고, 앞으로도 올곧고 맑은 문장으로 많은 독자의 마음을 일깨워 주기 바랍니다.
살아서 좋은 세월이 우리에게 허락된다면 기쁘고 즐겁고 유익한 일로 다시 뵙기를 소망하고 바랍니다. 부디 몸과 마음의 평안이 선생에게 오래 머물기를 멀리서 기도드립니다. 끝으로 옛날, 그러니까 2007년도 소생이 서울 아산병원에서 죽을병에 걸려 허덕일 때, 멀리 선생이 보내 주신 커다란 양란 화분을 받고 쓴 시조 한 편 뒤 딸리며 이 글을 맺을까 그럽니다.
나비란 / 나태주
-엘에이의 이정아 수필가님이 보내 준 꽃을 받고
꽃이 찾아오셨네요 바다 건너 먼 나라
사철을 꽃이 피고 반짝이는 도시에서
새하얀 나비를 닮은 나비란이 왔어요
한 마리가 아니라 열 마리 스무 마리
파닥파닥 나래 소리 들리는 듯싶고요
일어나 너도 일어나 나르라고 그러네요
화분이 어찌 저리 주인을 닮았으리…
크지만 사랑스런 저 자태를 보시구려
얼마 전 만났던 벗님 다시 뵌 듯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