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시인의 말
강가에 있는 돌과 얘기를 나눴습니다.
그 돌이 말했습니다.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어요.
여기 있는 동안
어떤 작은 돌들은 물살에 실려 여행을 떠났고
덩치가 큰 돌 몇은 공원의 담장이 된다고 떠나갔죠.
색과 모양이 예쁜 돌들은 예쁘다는 소리를 듬뿍 들려주는 이들과 떠나갔습니다.
나는 그저 이 자리에 있는 그냥 돌입니다.
뭔가 특별하지 않아요. 그래서 슬퍼하려고 했는데
후우, 그럴 틈이 없네요.
강물이 불었을 땐 물에 잠겨 젖은 돌이 되어야 하고 물이 줄어들었을 땐 마른 돌이 되어야 하죠. 비가 많이 내린 엊그제는, 새로 떠내려온 잔돌들이 옆에서 뭐라고 수런거리는지 들었고요, 송사리들이 숨을 곳 찾아내 밑을 파고들어 올 땐 간질거렸지만 힘껏 참고 있었어요. 구름이 많은 오늘은 해가 몇 번이나 구름에 가려지는지 세어 보려고 한답니다. 해가 쨍쨍할 때의 세상과 구름 그늘로 덮인 세상이 다른 걸 온몸으로 느끼면서요.
나는 바쁘지 않지만 아주 바쁩니다.
나는 그 돌에게
“너는 말이야, 언어가 없어 돌멩이로 마음을 전하던 아주 옛날, 어떤 아이가, ‘너를 많이 좋아해’라는 마음을 전하고 싶어 다른 아이에게 건넸던 바로 그 돌일지도 몰라!”
이런 말을 해 주려다가 하지 않았습니다.
바쁘지 않지만 아주 바쁜 그 돌은
자기 자리에서 햇빛을 받으며 오롯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그 모습이 내 가슴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돌들을 생각하며
그중 하나의 돌
신혜영
책 속에서
슬픈 날은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는 게 좋아
가방은 대충 등에 메고
보이는 것들을 허둥지둥 주머니에 담아
뭉뚝해져서 옆에다 밀어 둔 연필
그림이 지워진 지우개
구겨진 가정 통신문
캐릭터 피규어
동전 두 개
어느 주머니에 넣어 뒀는지 절대 기억하지 마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던 것들을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찾아봐
연필이 어디 있더라
부스럭부스럭
동전은?
뒤적뒤적
아무 주머니나 손을 찔러 넣어야 한다는 걸 기억해
이걸 왜 여기에 넣었지?
도대체 몇 번을 뒤져야 나오는 거야?
헤매는 손을 따라 흩어지다 조금 멀어질 거야
슬픔이
누가 내 말에 대답 안 해 준 것뿐인데도 슬픈 날이 있다니까
그래서 슬픈 날은
주머니가 많은 옷을 입는 게 좋아
―「누가 내 말에 대답 안 해 준 것뿐인데」 전문
눈사람을 만든 날
눈사람에게
모자는 주고 신발을 주지 않은 거야
아주 잘한 거야
어디 못 가고 계속 그 자리에 있을지 모르잖아
눈사람이 사라져 버린 오늘
가만히 생각해 보니
눈사람에게
꼭꼭 다져 단단한 마음은 주고
혼자 서 있어도 외로워하지 않는 마음은 못 준 거야
그러니까 햇볕 따라 가 버렸어도 할 말이 없는 거야
내가 그 자리에 혼자 서 있어 보니
알게 된 거야
질척해진 길바닥에 혼자 남아 있는 모자도
그 마음 말하는 거야
―「눈사람에게 주지 않은 것」 전문
가족들과 태국에 여행 와서 코끼리를 탔다
코끼리 등 위에 얹어진 의자에 엄마랑 앉아
야트막한 언덕도 오르고 냇물도 건넜다
높은 등 위에서 떠꺼덕 떠꺼덕 내 몸도 흔들렸다
코끼리 나라 왕이 된 기분일 거라던 친구 말이 떠올랐다
동생과 아빠를 태우고 앞에 가는 코끼리가
냇물을 건널 때 한쪽 다리를 절룩거렸다
나무둥치 같은 다리가 자꾸 꺾였다
“괜히 탔어. 내리고 싶다!”
절룩거리는 코끼리를 보던 엄마가 옆에서 중얼거렸다
우리가 탄 코끼리를 모는 태국 아저씨는
갈고리 달린 막대기로 자꾸만 코끼리를 쳤다
“내리고 싶어요!”
내가 소리쳐 봤지만 코끼리는 계속 걸었다
떠걱떠걱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코끼리는 다시 돌아왔다
코끼리 나라를 향해 걸어가라고 하고 싶었는데
대공원 코끼리 차보다 훨씬 재밌고 신기할 거라 했던 친구의 말은 다 뻥이었다
―「코끼리 나라를 향해」 전문
기억이 나지 않는데 보고 싶다 하는 거랑
기억 나는 게 없어 보고 싶지 않다는 거랑
어떤 게 솔직한 마음일까?
이 세상에 있지만 내 곁에 없는 거랑
아예 이 세상에 없는 것 중
뭐가 더 나은 걸까?
엄마랑 두 살 때 헤어진
이선우가 나한테 물었다
엄마 길고양이가 새끼 낳아 숨겨 둔 곳을 보게 된 날
새끼 고양이들이 꼬물거리며 뭉쳐 있는 곳만큼이나 어둑한 얼굴로
―「왠지 미안한 날」 전문
소나무 밑에서 주웠지
메추리알만 한
솔방울 열 개
집에 오니 인기 폭발이야
할아버진 옛날에 불쏘시개로 썼던 생각 난다며 한 개
엄마는 화분 위 장식으로 쓴다고 세 개
동생은 소꿉놀이한다고 두 개, 눈사람 만들 때 눈으로 쓰자며 두 개
놀기 대장 고양이 피터는 한 개를 앞발로 툭툭
하나 남은 솔방울
내 보물 상자에 꽁꽁 숨겨 두었어
난 어디에도 필요하지 않은 솔방울이 필요해
―「솔방울 열 개」 전문
언제 나가는 게 좋을까?
매미는 땅속에서 생각했어
7년 동안
틈틈이 땅 위 세상을 살폈지
오오, 창문들이 활짝 활짝 열려 있네!
내 노래 들을 준비가 다 되었군
저 정도면 공짜 공연을 해 줄 만하지
급한 맘에 옷 한 겹 더 걸치고 나온 매미
덥다 더워
한 겹은 나무 둥치에 벗어 놓고
뽀송해진 날개로
무대 오를 준비 중이래
조금만 기다려
―「매미는 가수라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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