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추천사
천향미의 시집 속엔 시간에 의한 상처와 통증이 가득하다. 현재라는 것은 항상 과거의 시간을 포함한 현재다. 천향미는 이러한 응축된 흐름의 존재인 ‘나’를 시 속에서 성공적으로 은유하고 있다. 또한 자신의 색깔을 통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문장과 은유로 시를 써 내려가고 있다. 그러한 문장 위에서 자신의 상처나 아픔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신만의 빛깔로 슬픔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 안민 (시인)
[ 시인의 말 ]
놓친다는 건
내 마음이 미처 안아주지 못한 감정 같은 것
어떤 밤엔 놓친 꿈이 더 선명하다.
2026년
천향미
책 속에서
오른팔이 자라는 동안 눈먼 소년의 생애를 왼손으로 받아 적는다
조금씩 관절 자라는 소리를 들으며 바깥을 경청하는 꽃들
방언으로 쏟아지는 언어를 버린 대가는 꽃의 몸을 입는 일
네 출생은 필연이었다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재는 대신 적막을 즐겨 봐
무표정하게 겨누는 저격수의 푸른 눈동자는 적요한 빛깔이었다
흔들리는 총구 아래 오래 서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재즈 멜로디를 부력 삼아 부풀어 올랐다
유통기한 지난 날개는 이제 그만 내려놓아도 좋아
닿을 수 없는 초록을 절벽이라 부르겠어
끝없이 멱살 잡히는 머리카락을 수습할 시간
잔기침을 하며 열두 번째 관절 인형이 돌아눕는다
더는 달려들지 않는 불빛을 추스르며 낮은 음역을 지날 때
네가 건넨 귓속말 허공의 문을 열고 들어선다
빙점 아래 내려앉은 서리꽃, 눈을 뜨고
기약 없는 초침 소리 메아리로 서성인다
또 다른 생이 펼쳐지는 겨울과 봄 사이
몇 번의 절기를 함께 견뎌낸 목소리 동심원으로 쌓여가는 동안
느닷없이 교차하는 비트 음에 눈을 감고 귀를 여는 꽃들
비로소 환해지는 소리의 비등점
시간이 시럽처럼 새는 줄도 모르고
--- 「[대표시], 식물학 연주회」 중에서
주머니 없는 웃음을 가득 털어 넣고 붉은 담요 속에 잠을 불러들였다
눈꺼풀을 깜박이는 동안 첫 만남을 노래하던 새는 여러 번 의자를 옮겨 앉았다
내 그림자에 뿌리내린 메아리는 낡은 괘종시계 속 부엉이처럼 드나들었다
바람이 바스락거리는 낙엽들을 불러 모아 조심스레 쓸어 담고 있다
창문 너머 겨울의 숨결을 타고 차가운 공기를 아슬하게 핥는다
나비의 날개처럼 부드럽게 당신 숨결에도 깃털 같은 계절이 내려앉을 때
길들지 않은 작은 짐승을 두 발 사이에 누이고 여린 잠을 다독인다
--- 「[대표시], 시간이 시럽처럼 새는 줄도 모르고」 중에서
종일 속을 달궈도 나는 끓는점에 닿지 못한다 바다는 뼈대가 된 파도를 불러 앉혀 놓고 수평을 저울질하고 있다 해변의 그림자를 어루만지는 동안, 눈 속 적색 점멸등이 깜빡이고 해변의 연인들은 수평선에 뿌리 내린 채 막 끓기 시작한 저녁 불빛을 나눠 마신다 스타벅스 엔제리너스 탐앤탐스 이름표를 단 조각 케이크들이 입술을 음미하고 있다 낮은 채도의 불빛 속에서 백색 소음은 물고기로 변주되고 시간은 반복되는 후렴구로 배열된다 나는 마지막 지점을 통과한 마라토너, 가쁜 숨은 폐 속에서 꽃가루로 흩어진다 하나의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잉태할 때, 한입 베어 문 울음이 폭발한다 사건은 뒤틀린 상상에서 시작되고 영화의 한 장면과 기묘하게 포개진다 검은 파도가 밀려오고 오랜 슬픔이 소환된다 반복되는 멜로디와 끈적한 올가미, 천천히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 모든 것은 아메바성 급성 뇌 질환, 검은 바닷속으로 잠겨 드는 어지럼증, 괜찮아 너의 탐색은 이제 멈추어도 좋아 밤새 창밖을 지키던 점멸등이 유리 벽 너머로 불빛을 흘려보낸다 파도의 침묵이 나의 모든 소란을 집어삼킨다 나는 물속에서 너무 오래 호흡을 멈추고 있었다 마지막 코딩 지점에서 내 몸을 빠져나온 소란 허공에 재배열된다
--- 「[대표시], 비등점 너머의 풍경」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