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문학평론가 강인숙이 복원해 낸 80년 전 서울의 기억과 전통문화의 미학
1945년 11월, 열두 살 소녀 강인숙은 밤중에 38선 한탄강 철교를 기어서 건넌다. 침목 사이가 너무 넓어 뱀처럼 납작 엎드려 건너야 했던 그 철교를. 이 장면에서 시작되는 『서울과의 만남』은 피란민 가족이 서울에 뿌리내리기까지의 혹독하고도 생생한 기록이다.
이 책은 두 층위로 읽힌다. 하나는 역사적 기록이다. 38선을 넘는 방법이 2년 사이에 네 번이나 바뀌던 혼란기, 1·4 후퇴 당시 한강이 얼어 달구지를 밀며 강을 건넌 피란민들의 풍경, 소한·대한 사이의 혹한 속 기차 지붕 위의 삶이 열두 살 아이의 눈높이로 세밀하게 포착된다. 또 하나는 문화적 발견의 서사다. 함경도 북방 문화 속에서 자란 저자는 서울에서 처음으로 한국 전통문화의 아름다움과 조우한다. 저자는 이 낯섦과 아름다움에 이끌리면서도 '너무 반듯한' 서울 문화에 저항하던 시절을 솔직하게 그린다.
서울의 문화는 충격이기도 했다. 서울 토박이 아이들의 단단하고 반듯한 현실 감각은 열두 살 니힐리스트에게는 낯설고 빡빡해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90대가 된 경기여고 동창들이 "아프다, 외롭다"는 말 없이 품위 있게 모이는 것을 보며, 저자는 비로소 이 이질적인 문화와 화해한다. "다른 것은 탐나지 않는데 늙는 것만은 '서울스럽게' 늙고 싶어진 것이다."
93세의 현재에서 열두 살에게 건네는 말
책은 과거와 현재가 교차한다. 글을 쓰다가 문득 경원선을 타야겠다고 생각한 83세의 저자가 한탄강역에 내려 철교 앞에 서는 장면, 70년 전 기어서 건넌 다리를 바라보며 그 시절 가족들을 불러 세우는 장면은 회고록이 아니라 한 편의 시처럼 읽힌다. 저자 스스로 밝히듯 "상상력이 부족하고 고지식해서 직접 겪은 것밖에 쓸 수 없는" 사람이 쓴 책이기에, 이 책에 담긴 모든 장면은 더욱 묵직하다.
역사가 개인을 어떻게 통과하는지, 그리고 그 통과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향한 감각이 어떻게 살아남는지-이 질문에 답하는 책이 『서울과의 만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