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20세기 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조르주 페렉의『나는 태어났다』가 개정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이번 개정판에서는 초판의 번역을 처음부터 다시 살피며 미흡했던 부분을 다듬고, 독자들이 페렉의 삶과 작품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필요한 역주를 보강했다. 페렉의 자전적 글쓰기를 조금 더 정확하게 전하기 위해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검토했다.
『나는 태어났다』는 페렉 사후에 ‘자전적 글쓰기’라는 주제 아래 엮인 책이다. 메모, 단편, 연설, 비평, 편지, 자화상, 신문 기사, 인터뷰, 서평, 라디오 방송 원고 등 서로 다른 성격의 글들이 한 권에 모여 있다. 이 다양한 글들은 페렉에게 자전적 글쓰기가 얼마나 중요한 문제였는지를 보여준다. 그에게 자서전은 삶을 시간 순서대로 정리하는 일이 아니었다. 기억과 망각을 오가는 작업이었고, 정체성을 탐색하는 방식이었으며, 말할 수 없는 것의 주변을 맴도는 우회적이고 파편적인 글쓰기였다.
페렉은 자신을 각기 다른 네 개의 밭을 가는 농부에 비유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사회학적’, ‘자전적’, ‘유희적’, ‘소설적’ 글쓰기로 나눈 바 있다. 물론 그는 이러한 분류가 자의적일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구분은 페렉 문학을 이해하는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특히 ‘자전적 요소’와 ‘제약contrainte’은 그의 글쓰기 전체를 떠받치는 두 축이다. 페렉의 작품에서 형식은 단순한 장치가 아니라, 말하기 어려운 것을 우회해서 말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나는 태어났다』에 실린 글들은 바로 그 자전적 글쓰기의 핵심으로 독자를 이끈다. 「나는 태어났다」, 「모리스 나도에게 보내는 편지」, 「기억의 작업」 등은 페렉의 독특한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W 또는 유년의 기억』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이 글들을 통해 우리는 페렉의 작품에서 기억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상실과 공백이 어떻게 글쓰기의 형식으로 바뀌는지, 그리고 한 작가가 자신의 기원을 확인할 수 없음에도 어떻게 끈질기게 자기 자신에게 다가가려 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나는 태어났다』는 조르주 페렉의 글쓰기에 이미 매료된 독자들에게는 그의 작품 세계를 다시 읽는 또 하나의 길을 열어주고, 아직 페렉을 깊이 접하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그 독창적인 문학 세계로 들어가는 좋은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책 속에서
첫 문장
나는 1936년 3월 7일 태어났다.
문제는 ‘왜 계속하나?’도 아니고, ‘왜 나는 계속할 수 없나?’도 아니라, ‘어떻게 계속하나?’이다(세 번째 질문을 통해서 나는 앞의 질문들에 대답해야 할 것이다).
---p.15
그는 그 사람에게 말을 할까, 설명해볼까,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온종일 이 순간을 기다려왔음을 깨달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말을 걸고,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을 데리러 와 주기를.
---p.25
20년이 지나, 그가 떠올려보려 했을 때(20년이 지나, 내가 떠올려보려 했을 때), 처음에는 모든 것이 불분명하고,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세세한 것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p.37
바로 그 순간 선택의 문제가 제기됩니다. 정확하게 삶 전체에 대한 질문입니다. 제게는 거의 낯선 것들을 신뢰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바로 그때 알게 됩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내 상황을 완전하게 책임져야만 하는 순간임을 알게 되지요.
---p.45
우리 앞에는 허공이 있고, 단번에 몸을 던져야 합니다. 단번에 두려움을 거부해야 하고, 단번에 포기하기를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러고 나서 감행해야 합니다
---pp.49-50
이 책은 헛된 추적의 흔적이고, 그런 추적에는 진실을 찾으려는 글쓰기의 과정이 은연중에 비친다. 게임의 규칙은 아주 단순하지만, 실제 시합은 정말 끔찍할 정도로 더 복잡하다.
---p.55
그 작업을 통해 장소들의 나이 듦과 제 글쓰기의 나이 듦, 제 추억의 나이 듦을 동시에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되찾은 시간은 잃어버린 시간과 뒤섞이는 셈이죠. 시간은 이 프로젝트에 달라붙어, 그 구조와 제약을 이룹니다. 책은 이제 지나간 시간의 복원이 아니라, 흘러가는 시간을 측정합니다.
---pp.66-67
나는 지나온 길을 따져볼 수 있나? 언젠가 내가 실제로 목표를 세우기라도 했다면, 나는 몇 가지를 완수했는가? 지금 나는 예전에 내가 되고 싶어 했던 나라고 말할 수 있나? 내가 살고 있는 세계가 내 열망에 부응하는지 묻지는 않겠다. 아니라고 대답하는 순간, 더 앞으로 나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할 것이기에.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서 끌어가는 삶은 내가 원했던 것에, 내가 기대했던 것에 부합하는가?
---p.79
나는 (글 쓰는 시간을 만들어보려는 것을 제외하고) 글쓰기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다른 것은 할 줄 아는 것이 없다. 다른 것을 배우고 싶지도 않았다. 살기 위해서 글을 쓰고, 쓰기 위해서 산다.
---p.80
글쓰기는 나를 보호한다. 내 단어들과 문장들, 능숙하게 연결된 문단들, 교묘하게 계획된 장章들로 쌓아 올린 성벽 아래서 나는 앞으로나아간다. 나는 재간이 부족하지 않다. 나는 여전히 보호받을 필요가 있나? 그런데 만일 방패가 굴레가 된다면?
---pp.82-83
꿈꾸는 사람으로서의 경험은 의도와 상관없이 이런저런 일을 거치며 유일한 글쓰기의 경험이 되었다. 그러니까 새롭게 드러난 상징도, 의미가 넘쳐나는 것도, 진실의 조명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이 텍스트들의 아주 깊은 밑바탕에 지나온 길이나 더듬거렸던 탐색이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오히려 말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현기증을 느꼈고, 저절로 생겨나는 듯한 텍스트에 매혹되었다.
---p.86
사실 제가 글쓰기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바는, 이 어린 시절이 제게 되돌아오는 방식입니다. 항상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즉 어떤 흔적처럼 글쓰기 속에 한순간 고정될 수는 있지만 이미 사라져버린 어떤 것과 관련해서 이루어집니다. 현재가 어떻게 개입하는지는 모르겠어요.
---pp.102-103
저는 일체주의라 부르고 싶은 어떤 것이죠. 별다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 이름만큼은 제가 아주 좋아하는 문학 운동이지요. 자기 자신에서 출발해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움직임 말입니다. 저는 이것을 공감이라고 부릅니다. 일종의 투영이자, 동시에 호소인 거죠!
---pp.104-105
내게 엘리스섬은 바로 유배의 장소, 말하자면 장소가 부재하는 장소, 흩어지는 장소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장소는 나와 관련이 있고, 나를 매혹하고, 나를 끌어들이고, 내게 질문한다
---p.110
이 사소한 불일치에, 미미하지만 집요하고, 은밀하며, 피할 수 없는 감정이 달라붙는다. 내 자신의 어떤 부분에 대해 어딘가 이방인이라는 감정, 즉 ‘다르다’는 감정인데,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기보다 ‘내 종족’과 훨씬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가령 나는 내 부모가 말했던 언어로 말하지 않는다. 나는 부모님이 갖고 있었을 어떤 추억도 공유할 수 없다. 그들의 것이었던 무언가, 그들을 그들로 존재하게 했던 무언가, 즉 그들의 역사, 문화, 신앙, 희망이 내게 전수되지 않았다.
---p.112
내가 엘리스섬에서 찾으려 했던 것은, 바로 돌아갈 수 없는 지점이라는 이미지, 극단적인 단절의 자각이다. 내가 질문하고, 문제 삼고,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비장소非場所, 이 부재, 모든 흔적과 말, 타자의 추구가 토대를 두고 있는 이 균열 속에 나 자신의 뿌리를 내리는 일이다.
---pp.113-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