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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1부. 하늘에 가까운 나이

상강霜降|하염없이|인생 사전|라산스카|한 여자를 스무 가지의 이름으로 불러 보다|겹꽃|오늘 밤에는|은엉겅퀴에게|은혼의 봄나들이|천년의 사랑|찰나의 꽃|원웨이 티켓|포토 포비아|심야 독백|여치와 그네를

2부. 그대가 있는 그 어디나 그곳이 천국

아스라이|서역 만 리|내 인생 경전의 첫 구절|달콤한 오역|이름 없는 경전|호접몽胡蝶夢|지상의 저녁|램프는 나직이 타오르고|그리움|검은 침묵|라다크|신의 얼굴|눈먼 사랑|히말라야에 가면|노승

3부. 외로운 만큼 더 푸른 바다에 닿을 것이다

보헤미아|모래내|슬픔이여, 안녕|꿈의 종점|시와 떠나는 철학 여행|끝|프놈펜의 아침|숨겨진 라오|오고 가다|딘톤|수목 한계선|긴 밤의 여로|다이아몬드 인 더 러프DIAMOND IN THE ROUGH|신생의 아침|그리운 이름, 영등포

4부. 슬픔과 분노를 넘어선 곳에 사랑이 있다

밤의 화엄경|검은 피에타와 두 개의 우화|북촌에서|그날의 독법|대화적 인간|산 자의 신성한 의무|여수 연가|누가 영영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릴 수 있는가|애월|실낙원|유채꽃 역설|신생|비둘기 통신|지구 통신|하늘 통신

후기. 어느 포유동물의 이야기

해설_ 세상에 살며, 세상의 바깥을 갈구하는 노래 . 김재홍
저자 소개
저자 : 이윤훈
시인 이윤훈은 평택에서 태어났다. 바람구두를 신고 떠도는 자칭 트루바두르이다.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시)로,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나를 사랑한다, 하지 마라』와 『생의 볼륨을 높여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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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불안과 상실의 시대, 인간 존재를 향한 치열한 기록
- 이윤훈 시집 『지옥마저 파란 쿠차에 가면』

200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시)와 202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시조)라는 두 번의 이정표를 통과해온 이윤훈 시인이 세 번째 시집 『지옥마저 파란 쿠차에 가면』(달아실시선 114)을 펴냈다.

바람구두를 신은 트루바두르, 서역 만리에서 실존을 묻다

스스로를 ‘바람구두를 신고 떠도는 트루바두르’라 명명하는 시인답게, 이번 시집은 공간의 한계를 지우고 전개되는 거대한 유랑의 기록이자, 그 길 위에서 마주한 실존적 영도(零度)의 탐색기다.

시인이 당도한 사유의 첫 정거장은 역설적이게도 ‘하늘에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비로소 눈에 들어온 일상의 담백함과 고독이다. 1부에서 시인은 “밥보다/ 시가 좋다”(「인생 사전」)며 단호히 ‘인생 사전’의 정의를 새로 내리거나, 인생을 ‘가을밤역’을 출발해 ‘실존역’으로 향하는 ‘원웨이 티켓’의 안개여행으로 규정한다.(「원웨이 티켓」)

이러한 실존적 고독은 2부에 이르러 서역 만리 실크로드라는 광활한 공간을 만나며 우주적 사유로 확장된다. 호탄의 백옥강, 라다크, 카일라스로 이어지는 고행의 길 위에서 시인은 문명과 사적인 아집을 모두 비워낸다.

겹겹이 주름진 붉은 협곡을 지나
마침내 푸른 석굴
흰 말을 탄 순례자
천년을 건너 또 천년
천상으로 가는 길 지옥마저 파랗다
백양나무 아래 구슬픈 류트 소리
천년의 슬픔을 내 것으로 받아도 좋은
지상의 하루
눈부시다
- 「서역 만 리 - 6. 푸른 석굴」 전문

협곡의 붉은 열기를 뚫고 마주한 푸른 석굴에서 시인은 “천상으로 가는 길 지옥마저 파랗다”는 경이로운 비전을 제시한다. 쿠차에서 ‘파랑’은 곧 행복의 색이며, 지옥 같은 치욕과 고통 속에서도 눈에 담아야 할 극락의 세계를 상징한다. 천년의 보석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의 푸른 빛깔로 써 내려간 이 연작들은 비극적 세계를 초월하려는 시인의 숭고한 영혼의 등고선이다.

변방의 세속적 만다라와 긴 밤의 여로

시인의 시선은 신비로운 도정(道程)에만 머물지 않고, 지상의 가장 낮고 소란스러운 표면으로 하강한다. 〈3부. 외로운 만큼 더 푸른 바다에 닿을 것이다〉에서는 베트남 하노이의 뒷골목 ‘딘톤’과 캄보디아 프놈펜의 아침이 날것 그대로의 언어로 스케치된다.

시인이 포착한 ‘딘톤’은 “사원 앞이 바로 시장”이고 생존을 위해 썩어버릴 남의 살을 주무르는 앳된 아가씨와 문신을 새긴 사내들이 뒤엉킨 “세속의 만다라”다. 고요는 죽은 자들의 것이기에 이 거리의 소란과 부대낌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는 시인의 시선은 깊은 인류학적 연민에 닿아 있다.(「딘톤 - 하노이 골목 스케치」)

동시에 이 여정은 고독을 통해 사랑을 증명해야 하는 외로운 투쟁이기도 하다. 서울 양양 간 고속도로의 긴 터널을 지나며 시인은 “외로운 만큼 더 푸른 바다에 닿을 것이다”라고 가속기를 밟는다. 터널이라는 빈속, 그 불면의 통로를 빠져나가 가랑비 내리는 속초의 빈티지 카페 ‘소설’에 안착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한 편의 서사시이자 파란 바다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의례다.(「긴 밤의 여로」)

상흔을 관통하는 역설, 분노를 넘어선 ‘사랑의 신생(新生)’

이번 시집의 심장부는 단연 〈4부. 슬픔과 분노를 넘어선 곳에 사랑이 있다〉이다. 시인은 가슴 아픈 한국 현대사의 현장인 순천, 여수, 제주의 북촌과 다랑쉬굴, 빌레못 동굴로 걸어 들어간다. 야만의 광기가 인간을 인간으로 읽지 않고 짐승으로 읽어내며 떼죽음을 한날한시에 몰고 왔던 참혹한 역사 앞에서 시인은 숨죽인 통곡을 받아 적는다.

섬 제주를 아름답다 하지 마라
유채꽃 피는 곳에 슬픔이 있다

섬 제주를 슬프다 하지 마라
슬픔이 있는 곳에 유채꽃 핀다

일출을 맞는 아침 제일로 크게 핀다
- 「유채꽃 역설」 전문

그러나 이윤훈의 시학이 빛나는 지점은 이 참혹한 슬픔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거대한 역설의 영양분으로 삼아 ‘사랑’을 피워내는 데 있다. 시인은 삭풍에 목이 꺾인 여수의 동백꽃을 바라보며 “인간을, 적어도 한 사람을/ 미워할 이유만큼이나 사랑할 이유가 있다”(「여수 연가」)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밤이 마지막으로 키워 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을/ 슬픔과 분노를 넘어선 곳에/ 사랑이 있다는 것을”(「신생」) 마침내 온몸으로 체득하며 ‘푸른 바람의 섬’으로 새로 태어난다.

가엾은 식충(食蟲)들을 향한 뜨거운 숟가락의 연민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후기 「어느 포유동물의 이야기」는 시인의 유년과 가리봉 골목의 청춘을 복원해내며 시집의 정서적 뿌리를 확인시켜준다. 특히 〈5. 숟가락〉에 나타난 밥과 인간에 대한 사유는 눈물겹다. “숟가락 안에는 배고픈 짐승이 산다”고 말하는 시인은 맨몸으로 상경한 아버지의 숟가락 하나, 한겨울 무덤 속에 숟가락처럼 누워 더는 슬픈 달을 파먹을 일이 없는 어머니를 호명한다.

희미한 불빛 아래 아내의 숟가락이 비스듬히 제 숟가락에 기대어 있는 것을 바라보는 중년 시인의 시선에서, 우리는 지상의 허기를 견디며 살아가는 모든 포유동물들을 향한 안쓰러움과 지극한 사랑을 읽게 된다. “등이 시린 날 식구,라는 말에서 달그락, 밥숟가락 소리가 난다”는 구절은 이 시집이 도달한 연민의 깊이가 어디까지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윤훈의 『지옥마저 파란 쿠차에 가면』은 방랑의 발걸음으로 시작해 역사와 개인의 상흔을 두루 만진 뒤, 따스한 밥 냄새가 나는 지상의 식탁으로 돌아오는 시적 만다라다. 지옥 같은 삶의 비극 속에서도 기어이 푸른 구원의 색을 찾아내어 우리 손에 쥐여주는, 올해 가장 눈여겨보아야 할 서정의 성취다.

· 시인의 말

잃어버린 무엇을 찾아 길을 떠나는
슬픈 눈동자

영원의 이름으로 길을 헤매는
아름다운 여행자

그대 이름은
시

2026년 여름, 바람객잔에서
이윤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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