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김희영의 시편은 소박하면서 구체적인 삶의 지점에서 우러나오는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형상화한다. 도드라진 점은 시집 전편에 실린 작품이 음식과 관련 있다는 사실이다. 시집 속에서 다루는 음식은 종류와 재료가 천차만별이며, 만드는 과정이라든가 음식에 얽힌 사연이 다채롭다. 시인이 다루고 있는 음식은 우리가 자주 먹거나 한 번쯤 맛보았던 것들이다. 여기에는 밥부터 시작해서 반찬, 죽, 국 등을 비롯한 온갖 음식이 나열되어 있다. 이들을 한 상에 차려 놓으면 그야말로 산해진미가 될 터인데, 이보다도 시인이 음식을 장만하고 재료를 손질해서 완성하는 과정뿐만 아니라 식재료와 관련한 시인의 체험적 의미 부여가 독특하면서도 참신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별생각 없이 끼니를 때우기 위해서, 혹은 시장기나 적적해진 입맛을 달래기 위해 먹는 요리나 별식에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시인이 펼쳐놓은 식단이 지닌 속내와 마음의 결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정훈(문학평론가)
시인의 말
요리 만드는 일이
시를 쓰는 일만큼
값지다는 것을
요즘 들어 피부로 느낀다
나이를 먹을수록
한 줄의 시가
한 접시의 음식이
더욱 소중해진다
심혈을 기울여 쓴
한 줄의 시구는
요리를 만드는 일과 다름이 없고
가족을 위해
온 정성 쏟아 만드는 요리는
시를 쓰는 일과 다름이 없다
하루를 맞고 또 하루를 보내며
오늘도 나는
시를 쓰듯 요리를 만들고
요리를 만들 듯 시를 쓴다
언제나 내 곁에 있어
나의 냄새 고스란히 배어있는
시 쓰기와 요리 만들기는
내 삶의 마지막까지
함께 가야 할 길이다
책 속에서
<밥상머리 사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밥상머리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 피우는
가족들의 모습이 아닐까
달그락달그락 젓가락 부딪는 소리
아삭아삭 반찬 씹는 소리
감미롭게 번지는 밥 먹는 소리
밥을 적게 먹는다고
좋아하는 반찬만 골라 먹는다고
잔소리해 온 시간도
밥을 안 먹는다고
인스턴트 음식을 즐겨 먹는다고
걱정으로 채워온 날들도
마음으로 전해지는 사랑이리라
밥상 앞에서 느껴보는 행복이리라
<약밥이 속삭인다>
설탕을 사용하지 않고도
달달하게 입맛 돋우는
건강식 약밥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의 끝에서 번뜩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각 하나
물 대신 푹 우려낸 대춧물 붓고
달짝지근한 호박말랭이 넣으면
어느새 한 솥 가득 부푼
약밥이 환하게 웃는다
보라
빛깔도 곱게
멋스러운 무늬를 이루고 있는 약밥
달달함과 고소함이 가득한 향
약밥이 귀엣말 속삭인다
틀을 깨고 도전하라
안되면 될 거라는 꿈을 꾸라
<자투리와 카레라이스>
냉장고 문을 여니
쓰다 남은 야채들이 속절없이 삭아간다
한때는 없어서는 안 될 재료들이었지만
쓰고 남은 것들이라
저리 홀대를 받나 싶어
뒹구는 채소들 몽땅 불러모아
감자와 당근은 애벌삶기를 하고
닭가슴살과 재료를 넣어 함께 끓인다
섞이고 익어가면서
스스로의 향기를 아낌없이 풍긴다
자투리로 만들어낸 요리지만
다른 반찬과 견줄 수 없는
맛깔스런 카레라이스
밋밋한 삶
활기차게 이끌었을 때처럼
카레라이스 한 입 맛보는 마음이
한없이 뿌듯하다
<행복이 노랗게 익은 -호박죽>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것 같은
호박이지만 쉽게 생각하면 안된다
부드러운 속살 감싼 딱딱한 껍질
무작정 칼날 들이대기 전에
조심조심 달랠 줄 알아야 한다
불려놓은 강낭콩과 검은콩을 넣고
소금과 설탕으로 간을 하고
함께 푹 삶는다. 김이 빠질 때까지
기다림의 미학도 알아야 한다
물러진 호박을 으깨어
적당히 물을 붓고 펄펄 끓인다
찹쌀과 맵쌀가루 골고루
뿌리기를 반복해서 젓는 동안
럭비공처럼 튀어 오르는 호박죽물
뜨거움에 수도 없이 놀라고
온 힘으로 참아내다 보면
사랑과 정성의 맛이
달큰달큰 어우러진다
행복이 노랗게 익은 호박죽
<영양라떼와 어머니 2>
병원에 누워계신 어머니를 위해
나만의 영양라떼를 만든다
삶은 고구마 믹서기에 넣고
우유 부어 갈아 끓인다
단호박, 밤 가루 추가하고
당근, 양파, 양배추, 브로콜리까지
양념 같은 미숫가루 두어 스푼 넣어 끓이면
최고의 영양라떼가 된다
대충 저어 눌어붙기도 하고
불 조정이 서툴러 펄펄 끓어 넘치기도 하고
깊고 진한 맛의 영양라떼가 되기까지
허둥거렸던 많은 시간들
영양라떼를 끓이듯
어머니의 병간호에도 서툴기만 했던
처음 몇 달간
영양라떼를 끓여온 시간만큼
어머니 병간호에도
익숙해져 간다는 것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