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발문
기억의 숨결, ‘두 개의 집’
서용순 (수필가, 이지출판 대표)
손묘랑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두 개의 집》에 실린 93편의 시를 꼼꼼히 읽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의 시에 담긴, 그가 하고 싶은 얘기들이 뇌리에 한참을 머물다가 가슴으로 내려와 박혀 버렸기 때문이다. 첫 시집 《일상에서 문득》을 내고(2024년) 2년 만에 다시 펴낸 시집에는 더 깊어진 사유와 간결한 시어, 그리고 담백해서 더 와 닿는 표현들! 나는 이 글을 시작하기 전, 먼저 그에게 고백하고 싶다. “제가 사랑해도 될까요?”라고. 이런 시인을 만난 건 행운이 다. 독자로서도 출판인으로서도 기쁨이자 희열이다.
타국에 살며 시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삶의 뿌리를 다시 더듬는 일이다. 이 시집에 실린 시들은 낯선 땅에서 길어 올린 기억의 숨결이며, 시간과 거리로 인해 더욱 또렷해진 ‘과거와 현재’라는 이름의 내면 풍경이다.
시인은 떠나온 자의 운명을 안고 있다. 떠난다는 것은 끝이 아니라, 끝없이 되돌아가는 또 하나의 시작이다. 이 시집에는 어린 날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길, 고향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곳곳에 담겨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아가기 위해 다시 불러내는 존재의 근원이다.
낯선 언어와 문화 속에서 때로는 고독이 문장이 되고, 외로움이 행간이 되었다. 그 고독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것들이 머무는 자리다. 그곳에는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 건네지 못한 안부, 돌아갈 수 없는 시간들이 고요히 쌓여 있다.
그의 시들은 가슴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그리움으로 물들어 있다. 그의 시를 읽고 있으면 낮과 밤이 여명 속에서 서로 맞물리듯 그 경계에서 진한 기억과 멈출 수 없는 사랑이 교차한다. 그의 시가 단단하고 감동적인 것은 유니크한 시적 모티브에 의해 농축된 시상과 원형적인 정서가 자연스럽게 잘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 품격이 느껴지며, 감동의 진폭을 더해 준다. 이것은 치열하게 살아온 삶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집은 4부로 나누었다.
‘제1부 내 안의 은하수’에는 “시간 속에 갇혀 야위어 가지 않고 오직 그대와 내 마음속에만 머물러 있는” 사랑 이야기가 담겨 있다. 계절도 일상도 세월도 그 무엇도 그에게는 “사랑으로 영글어” 빛나는 것이며, 그것은 삶을 지탱하는 힘이요, 시를 쓰게 하는 근원적인 이유다.
‘제2부 詩가 있는 자리’에서는 고향과 부모님을 회억하면서, 엄마가 되어 엄마의 마음을 알게 되었음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네가 선 자리도, 네가 낸 목소리도, 너의 꽃 같은 웃음도” 모두 “한 편의 詩”였으며, “너의 등 너머 스크린에서는 너와 닮은 詩가 또 다른 詩를 낳”아 그 “무한한 詩의 바다”를 남나들게 되었다고 한다.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 않고 사라져 가는
것들을 다시 불러오는 것이 시인의 역할 아니던가.
‘제3부 둘 그리고 하나’에서는 ‘나’와의 그리고 ‘그’와의 만남이다. 시인은 그 기억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잇고, 타국과 고향을 연결하며, 개인의 삶을 보편의 서정으로 확장한다. 그래서 이 시집의 시들은 한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떠나온 모든 이들의 마음에 조용히 다가간다. 또한 ‘그’를 향한 “저 우주와도 바꿀 수 없는” 순애보는 시인의 곱고도 당찬 심성을 느끼게 한다.
‘제4부 겨울을 노래하는 이’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자신에게 이렇게 약속하고 있다. “난 너에게 할 말이 많아, 슬픈 얘기도 어려운 얘기도 있지만, 나는 너의 대답이 늘 웃음으로 나오길 바라며, 너를 힘들게 하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어.” 여기서 독자들은 한 편의 긴 귀향을 마친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 비록 몸은 여전히 타국에 머물러 있을지라도, 마음은 수시로 시공을 넘나들며 그 여정 끝에서 순응하는 시인, 부재 속에서 오히려 더 또렷해지는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우리에겐 그것이 무엇이든 끝내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글은 내 손을 떠나는 순간 독자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감동으로 평가받는다. 그러기에 나의 얘기가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시인의 시는 쉽게 잘 읽힐 뿐 아니라 그의 그리움 속에 박혀 있는 견고한 그리움을 따라가다 보면 나의 그리움도 만나게 된다. 이것은 삶의 무게를 떠받치고 있는 그의 경험과 지혜가 온전히 발화되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마무리하며 손묘랑 시인의 눈부신, 그리고 신실한 고백이 담긴 시 〈빈 자리〉 전문을 소개한다.
나 가진 것 없어도
그대와 같은 방향은
바라볼 수 있네
나 가진 것 없어도
그대 노래자락 끝에
박수갈채는 보낼 수 있네
나 가진 것 없어도
그대 지친 하루 쉴
빈 자리 하나
내어놓을 수 있네
그마저 못하는 날엔
마지막 남은 사랑 하나
꼭 남겨 두기로 했네
그것이 내가 가진 전부이므로.
시인의 말
나는 가끔
음악과 시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음악은 흘러가고
시는 머문다.
그래서 나는
머무는 쪽을 택한 것 같다.
이번 시집에서도
지나가다 문득 붙잡은 순간들을 담았다.
새로운 것을 만드는 힘이 부족하더라도
사라지지 않는 마음으로
그 순간들을 남기고 싶었다.
이 시들이
당신의 어느 순간에
잠시 머물다 가기를 바라며
멀리 동경에 있는 나에게 시의 길을 걷게 해 준
윤보영 시인님께 더없는 감사를 드린다.
따뜻한 시선으로 이 시집에 숨결을 더해 준 서용순 대표님,
라인아트로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해 준 Travis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6년 6월
손묘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