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실천하는 행동가로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선구자가 되다
이미 1970년대부터 수자원이 부족해 주민들이 고통을 겪고 있었던 목포시에 1981년 영산강 하굿둑이 건립되며 영산호가 조성되었고 목포의 물 부족 문제는 곧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이듬해인 1982년, 몽탄강 상류 영산포 삼영리에 주식회사 진로가 주정 공장을 건설하겠다는 신청이 접수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주민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고 정보를 입수한 소수의 인사들이 막후 교섭을 통해 반대 의사를 관계 당국에 전달하고 있을 뿐이었다. 주정 공장이 들어서면 하루 2700㎥의 폐수가 목포의 상수원인 영산강에 흘러들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게 된 서한태는 지역민들의 건강과 직결되는 이 문제는 범주민운동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곧 '영산호 보존회'라는 환경단체를 조직, 반대투쟁을 시작했다.
당시는 전두환 군사정권의 서슬이 시퍼랬던 시기였고, 반대운동을 차단하려는 정보기관의 은근한 압박도 있었지만 그는 굽히지 않았다. 목포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 운동은 무안, 함평, 영암, 해남 등 영산호 주변 군 지역으로 확산되어 나갔다. 6개월 여의 투쟁 끝에 결국 주정 공장 설립 계획이 철회되었다. 서한태는 당시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그때 안 해본 게 없었다. 가두캠페인, 서명, 플래카드 걸기, 리본 달기, 설문조사, 현장답사, 항의방문, 민원제기, 강연, 연극까지...”
이 일은 한국 환경운동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어떤 외부 세력의 개입도 없이 자생적으로 조직된 순수 시민 운동이라는 점, 그리고 당시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예방적 환경운동이었다는 점에서 여타의 환경운동들과 차별화된다. 대부분의 환경운동이 오염으로 인한 피해에 대한 보상 차원의 사후적 대응에 머물렀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한국 환경운동사에 있어 첫 성공 사례로 꼽히는 이 운동은 목포라는 지역을 넘어 전국의 환경운동 발전에 큰 이정표를 세운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당시에는 환경운동이라는 말조차도 생소했고, 서한태는 그저 23만 목포 시민이 마실 물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서한태가 헤쳐 나간 길이 곧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길로 이어졌다.
이를 계기로 서한태는 환경운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섰다. 1986년에는 삼학도에 4천 톤 규모의 시멘트 사일로를 만드는 계획을 무산시켰고, 1987년에는 신안비치호텔의 유달산 케이블카 설치 계획을 막아내는 등 목포 지역의 주요 환경운동을 앞장서 이끌었다.
이후 그는 평생 ‘영산강 지킴이’를 자처하며 물관리 일원화를 주창하는 등 평생을 환경운동에 헌신했다. 체력이 약해지자 병원 건물을 환경단체에 선뜻 내주고, 전남환경운동연합 상임고문을 맡아 후배들의 활동을 지원했다. 그는 “유럽은 역간척이 진행되는데 우리는 새만금과 시화호에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다”며 주암댐 건설과 영산강 간척(4단계)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냈다. 이런 과정에서 영산호보존회, 삼학도보존회, 유달산보존회 등을 이끌고 목포녹색연구회, 목포환경운동연합 등을 창립했다.
이런 실천 철학과 활동을 담아 1996년부터 10년 동안 소식지 『환경과 건강』 15호를 발간했고, 『내 땅을 지키고자』, 『환경에 관한 150가지』, 『쾌적한 환경을 찾아서』 등 저서를 꾸준히 펴냈다.
이런 공로로 그는 대통령 직속 지속가능발전위원회 위원을 지냈고, 교보 환경문화상 대상과 국민훈장 동백장, 올해의 호남인상 등을 받았다.
젊어서 한때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사회운동에 투신한 사람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나이 들면서 현실과 타협하며 운동과 멀어진다. 반대로 평범하게 살다가 중년 이후 운동에 나서서 죽는 날까지 신념을 실천하는 경우는 드물다. 서한태는 의사로서 안정된 소득을 얻으며 여유롭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으나 홀연히 환경운동에 나섰고, 세상을 마칠 때까지 흔들림 없이 실천적 환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옳은 길에 나서는 일보다 어려운 건 그 길을 일관되게 걸어가는 것이다. 나날의 일상을 끝없는 실천으로 채워 는 것이야말로 운동가에게 가장 큰 덕목일 것이다.『서한태 평전』은 서한태의 삶을 통해 지역의 큰어른으로서, 그리고 실천적 환경운동가로서 그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는 책이다. 그리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역사 또한 자연스럽게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책 속에서
1983년 6월 15일은, 그간 의사라는 직업을 밑천 삼아 지역의 명망 있는 어른으로 살아온 서한태가 환경운동에 첫발을 내디딘 날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환경운동이라는 말조차도 생소했고, 그저 23만 목포 시민이 마실 물을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서한태가 헤쳐 나간 길이 곧 환경운동의 길로 이어졌다. 그날 오후 5시에 서방사선과 의원 2층에서 열린 청호라이온스클럽 이사회에서 진로 주정공장 설립 저지 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55쪽
여론의 역풍을 맞은 쌍용과 항만청은 서한태와 삼학도보전회에 사람을 보내, 은근히 타협안을 제시해 왔다. 가령 쌍용양회에서 삼학도 공원 조성에 돈을 대고 적극 협력하거나, 시멘트 하역 설비에서 공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철저히 조치할 수 있다면 찬성하겠느냐는 식이었다. 또 삼학도에는 사일로만 짓고 나머지 부대시설은 다른 곳에 짓는 방안도 제시해 왔다. 하지만 서한태는 이들의 어떤 타협안에도 거절 의사를 명확히 했다. -144쪽
사람들은 흔히 토지를 개발하거나 큰 건물이 들어서는 것이 발전이라고 생각하지만 서한태는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는 것”이 발전이라고 보았다. 또한 “대규모 개발에 골몰하기보다는 작더라도 잘못된 것을 고치는 것”을 진정한 발전이라고 했다. 그런 만큼 ‘개발은 깔짝깔짝하는 게 낫다’라고 했다. -253쪽
환경토론회를 열면서 서한태가 역점을 둔 것은, 각 지역 환경운동가를 발굴하는 일이었다. 운동은 기본적으로 친목의 바탕 위에서 가능하다는 것이 그간의 경험을 통해 얻은 그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형식은 환경토론회였으나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각 지역의 활동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친목과 유대감을 다지는 데 힘썼다. -271쪽
소박하고 검소한 생활도 건강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서한태의 주변 사람들은 그가 새 옷 입은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여름에는 남방 두 벌을 번갈아 빨아 입었고, 겨울은 점퍼 하나로 났다. 계절 따라 입을 한두 벌 정도만 남기고 나머지 옷을 다 버린 듯했다. 양복은 격식 차리는 자리에 나갈 때 입을 겨울용과 봄 가을용 한 벌씩이 전부였다. -282쪽
‘두는 자리에다 두어라.’ 누구라도 어렸을 적에 집안에서 들었을 법한, 그리고 부모의 흔한 잔소리로 여겨 흘려들었을 만한 말이다. 그러나 서한태는 아버지의 그 잔소리를 평생 마음에 두고 실천했다. 나아가 일상의 물건만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도 두어야 할 자리에 두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환경운동가로서 서한태의 사상적 줄기는 어쩌면 아버지의 그 잔소리에 뿌리를 두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