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책 속에서
백서를 쓰는 황사영의 심정을 가슴으로 느끼며 또 읽었다. 내가 황사영이 되고 황사영이 내가 되었다. 239년 전에 살았던 황사영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황사영은 천주교 순교자로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사지가 찢겨 죽는 순교의 길을 택했지만, 그는 천주교에서도 대접받지 못하고 우리 역사에서도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 그가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조선에서 벌어지는 살육의 미친 춤판을 끝내 달라고 교황님에게 편지를 써서 보낸 일이 과연 역적으로 비난받을 행위일까? 당시 조선 백성의 삶과 정치 상황 그리고 천주교 박해의 실상을 안다면, 누가 황사영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작가의 말」중에서
진복은 신부는 되지 못했지만, 항상 마음속에 하느님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것은 7대조 할아버지의 혼령이 그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진복은 힘들 때마다 명례방이 있던 명동성당으로 가서 할아버지의 흔적을 찾았다. 당시 신자들은 조정의 추적을 피해 모임 장소를 명례방의 김범우 집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조선 천주교회의 씨앗이 싹을 틔웠다. 그 명례방 모임의 주역은 이벽과 이승훈 그리고 정약용이었다. 사학자인 진복은 정약용 집안에 관심이 많았는데 정약용 집안은 천주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의 울타리처럼 엮여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학을 학문이 아닌 종교로 받아들여 조선 천주교의 시발점이 된 인물은 광암 이벽이다. 그는 정약용 집안과 사돈 관계였는데, 이벽의 누이가 정약용의 큰형 정약현의 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정약현의 딸 정명련은 황사영과 혼인함으로써 황사영은 정약용 집안의 사위가 되고, 우리나라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은 정약용의 누이와 혼인함으로 정약용과 이승훈은 처남 매부 사이다.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은 정약용의 외사촌이었고 정약용의 작은형 정약종과 그의 아들 정철상은 천주교회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다가 순교했으며 정약종의 막내아들 정하상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우리 천주교회의 수호성인으로 지정되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한국의 천주교는 정약용 집안에 크게 빚지고 있다. 진복은 자신도 신부가 되지 못한 죄책감이 정약용이 천주교를 배교한 것과 중첩되어 가슴을 울리고 있었다. 배교로써 목숨을 부지한 정약용과 끝까지 믿음을 지키다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능지처참을 당한 황사영의 얼굴이 대비되어 진복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사영백서의 미스터리」중에서
천진암에 모인 일행은 처음에는 서양의 사상과 기술에 집중하였다. 서양의 학문을 공부하는 가운데 이벽은 특히 천주교의 교리를 중시하였다. 이벽이 주도하는 천주학 강학 모임이 서서히 종교적 신앙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실학자들은 천주실의 책을 필사하여 나누어보며 천주학을 학문에서 신앙으로 발전시켰다. 그것이 최초의 한국 천주교 신앙의 시작이었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자발적인 신앙의 시작이었다. 한국 최초의 천주교는 1777년 이벽, 권철신, 정약전, 정약용, 이승훈 등이 경기도 광주의 주어사에 딸린 암자 천진암에 모여 천주학을 비롯한 서양 학문을 연구한 데서 시작된 것이다.
---「조선 천주교의 씨앗을 뿌린 이벽」중에서
정하상이 일곱 살 때 황사영이 죽었지만, 정하상은 사촌자형 황사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정하상이 아버지의 뜻을 이어 천주교를 조선에서 부활시키려고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황사영이었다. 하상은 황사영이 교황님에게 보낸 백서를 찾아 헤매었지만,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좀처럼 부흥의 계기를 찾지 못하는 조선 천주교회를 위해 흩어진 교인들을 찾아내 신앙의 불길을 다시 태우게 하고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조직화하는 한편, 조선 천주교에 다시금 성직자를 파견해 주도록 북경 주교에게 계속 편지를 보내기로 했다.
---「정하상, 황사영의 뜻을 이어가다」중에서
1838년, 명련이 제주에 온 지 38년이 지났다. 고왔던 손은 부르트고 굳은살이 박여 이제는 영락없는 노비의 손이었다. 명련의 머리는 하얗게 서리가 내렸다. 육십 가까이 되자 이제 제주 사람들은 명련을 한양 할망으로 불렀다. 명련은 한양으로 떠나는 대정 현감의 배려로 독립해서 살 수 있는 외거노비로 인정받아 초가집에 혼자 살며 전교 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명련의 외딴집에서 전해진 성경 말씀은, 바다에서 남편을 잃은 과부들과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섬사람들의 마음에, 마른 수건에 물이 스며들듯 조용히 스며들고 있었다. 명련의 친구 간난이가 아주 열심히 전교 활동을 하여 명련을 따르는 신자들이 이백여 명에 이르렀다.
---「정명련이 아들 황경한을 만나다」중에서
황사영 묘에는 참배객이 끊이지 않았다. 황사영의 묘는 의정부교구 송추성당에서 관리하면서 무덤 주위에 십자가의 길을 세우고 무덤 옆에 작은 성당을 지었다. 진복이 황사영의 무덤 앞에 섰는데 마침 진복의 마음을 아는 듯 비가 내리고 있었다. 황사영 묘 앞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릴 수 있게 조그맣게 조성되어 있었다. 신자들이 황사영의 무덤 앞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황사영의 길이 십자가의 길이었다. 진복은 무덤 앞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였다. 황사영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황사영의 피가 후손들에게 이어져서 오늘의 우리나라를 만든 것이다. 우리 순교자들의 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교회는 세계가 부러워할 정도로 천주교 개신교 할 것 없이 예수님을 믿는 십자가로 대한민국 성공의 밑바탕이 되었다. 모두가 대한민국을 한강의 기적이라 이야기하지만, 이는 순교자들이 흘린 피의 기적이었다.
---「황사영의 무덤을 찾아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