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자멘호프의 에스페란토, 장벽을 허무는 평화의 언어
이 위대한 문학적 자산을 인류의 언어적 평화를 위해 태어난 '에스페란토(Esperanto)'로 읽는다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경험입니다. 에스페란토의 창시자 루도비코 라자로 자멘호프(L. L. Zamenhof) 박사는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발생하는 오해와 증오,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이 평등하고 아름다운 언어를 만들었습니다.
자멘호프 박사는 특정 국가의 패권적 언어가 아닌, 누구나 공평하게 배우고 소통할 수 있는 인공어이자 자연어를 꿈꿨습니다. 그 역시 안데르센의 동화가 가진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깊이 이해했기에, 안데르센의 수많은 명작을 직접 에스페란토로 번역하여 전 세계 에스페란토 보급에 앞장섰습니다.
에스페란토로 번역된 안데르센 동화는 자멘호프가 지향했던 '인류인주의(Homaranismo)'―즉, 국경과 민족을 넘어 모두가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념―와 완벽하게 맞닿아 있습니다. 명료하면서도 음악적인 에스페란토의 어조는 안데르센 동화 고유의 서정성을 한층 더 맑고 투명하게 드러내 줍니다.
전라도 사투리, 가장 한국적인 정서와 가락의 변주
그렇다면 왜 전라도 사투리일까요? 우선은 제가 전라도 출신이기 때문에 이런 시도를 했는데, 흔히 사투리는 변방의 언어, 혹은 정형화되지 않은 투박한 언어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전라도 사투리는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이 가장 진하게 배어 있는 갯벌 같고, 깊은 장맛 같은 언어입니다. 판소리의 고장답게 문장마다 독특한 가락과 리듬감이 살아있으며, 단어 하나에 담긴 감정의 밀도가 대단히 높습니다.
이번 대역 작업을 하면서 저는 안데르센 동화의‘낮은 곳을 향한 시선'이 전라도 사투리의‘서민 지향적인 정서'와 완벽하게 공명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를 들어, Avineto를 표준어인‘할머니'로 번역했을 때와 전라도 사투리인‘쪼깐한 할매'로 번역했을 때 느껴지는 정서적 거리는 사뭇 다릅니다. 투박한 듯하면서도 끝없이 다정한 전라도 사투리는, 안데르센이 동화 속 주인공들에게 보냈던 그 애틋한 위로의 온도를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훌륭한 매개체였습니다.
미운 오리 새끼가 구박받는 장면에서의 짠하고 서글픈 마음, 성냥팔이 소녀의 시린 손끝, 오래된 가로등이 홀로 밤을 지키는 외로움은 전라도 사투리 고유의‘짠함'을 통해 우리 안방의 이야기처럼 절절하게 와닿게 됩니다.
세계성과 지역성의 아름다운 만남을 기대하며
에스페란토라는‘가장 세계적인 언어'와 전라도 사투리라는‘가장 지역적인 언어'의 만남. 이 어찌 보면 극단적인 두 언어의 결합은 사실 하나의 커다란 가치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다양성의 존중'과‘소외된 가치의 회복'입니다.
자멘호프가 강대국의 언어 패권에 맞서 약소국과 소수 민족의 언어권을 지키기 위해 에스페란토를 만들었듯, 소멸해 가는 지역의 방언을 기록하고 문학적 언어로 승화시키는 작업 역시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는 소중한 실천입니다. 안데르센이 말한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햇빛과 자유, 그리고 작은 꽃 한 송이가 있어야 한다”라는 격언처럼, 우리는 이 책을 통해 거대 언어가 주는 편리함 속에 잊혀 가던‘작은 꽃송이' 같은 언어들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고자 합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한쪽 눈으로는 지구촌을 하나로 묶는 에스페란토의 평화 정신을 배우고, 다른 쪽 눈으로는 전라도 사투리가 가진 구수한 인간미와 해학을 만끽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안데르센의 위대한 유산이 국경을 넘어, 그리고 우리 땅 전라도의 깊은 골짜기까지 스며들어 모두의 마음에 따뜻한 위로의 등불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함께 읽기라는 공간을 통해 번역의 글을 같이 나눌 수 있었음에 감사드리며, 물심양면으로 수고하신 모든 분께 대단히 고맙다는 말씀을 전합니다.
싱싱한 장미꽃 한 송이가 호메로스 무덤가에서 피어나듯, 이 작은 책자가 자멘호프의 이상과 우리네 어머니들의 다정한 숨결을 잇는 이쁜 다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봅니다.
- 오태영(mateno, 진달래출판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