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사 서평
“아이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이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이혼 법정에서 얻은 통찰을 따뜻하고 단단한 문장으로
이 책이 가장 깊이 다루는 주제는 아이의 관점에서 본 이혼이다. 정현숙 판사는 법정에서 만난 수많은 아이들의 사례를 통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한다. 아이에게 가장 위험한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고립감이다. 겉으로 ‘괜찮은 아이’처럼 보이는 경우가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부모의 관계는 끝날 수 있지만, 아이의 삶은 계속되며 그 과정은 안전하게 설계되어야 한다. 그는 ‘법이 할 수 있는 일은 양육비를 정하고 재산을 나누는 것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너머의 자리 - 부모의 마음이 비로소 아이를 향해 돌아서는 순간 - 까지 함께 가고 싶다는 바람을 책에 담았다.
『덜 아픈 마침표를 위하여』는 법률 절차를 넘어, 좋은 이별이란 무엇인지, 아이에게 상처를 덜 남기는 방법은 무엇인지, 관계가 끝난 뒤 인간은 어떻게 다시 성숙해지는지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이 책은 이혼을 겪는 사람뿐 아니라, 관계·가족·성숙·책임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어른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고 있다.
독자 대상
- 이혼을 심각하게 고민하시는 분
- 이혼하고 싶은데 어린 자녀 때문에 고민되시는 분
- 헤어지는 것이 두려워 결혼을 망설이시는 분
- 이혼전문판사의 이혼 이야기가 궁금하신 분
책 속에서
부부는 내가 선택해서 만드는 유일한 피의 관계이다. 서로 간에 흐르는 동일한 유전자의 피가 전혀 없는데도 그 어떤 혈연관계보다도 더 강력한 피의 관계이다. 이 세상 그 어떤 관계가 이런 관계가 있는가. 그래서 그렇게 힘든 것이다. 그 마침표가.
이혼은 죽도록 힘들 수밖에 없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극한의 힘듦을 겪게 된다. 피의 관계를 종료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혼은 삶의 한 문을 닫는다. 그러나 동시에 또 다른 방의 문을 열어준다. 그 방에는 자기 성찰과 책임, 그리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놓여 있다. 상처 이후에 자라는 사람은 분명 이전과 다르다. 덜 순진하지만 더 진실하고, 덜 의존적이지만 더 깊이 연결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법은 관계의 종료를 선언한다. 그러나 인간의 성숙은 판결문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을 견딘 시간 속에서 스스로에게 내리는 작은 판결들로 영글어진다. 상처를 통과한 사람은 이전보다 조금 더 깊은 사람이 된다. 그리고 다시 빛날 것이다. 반드시.
서산에 뉘엿뉘엿 해가 저물어가지만, 서산의 노을만이라도 온전히 당신 자신의 것으로 향유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눈빛을 차마 외면하기 어려웠다. 평생을 하대했던 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신의 존재가치를 온몸으로 누리고 싶었을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녀는 어쩌면 용기 있는 전사일지 모른다.
인간이 일부일처제를 택한 이유는 완벽해서가 아니라 불완전함을 제어하고 싶었기 때문일지 모른다. 우리는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을 길들이며 살아간다. 그 길들임 속에서 우리는 단순히 번식하는 존재가 아니라 약속을 지키려 애쓰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본능만으로는 유지되지 않는 관계를 선택함으로써 본능을 넘어서는 존재가 된다. 우리는 본성을 넘어서는 삶을 살아가기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다.
사랑이 끝났다고 해서 모든 시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울고 웃던 나날들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을 더는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족하다. 좋은 이별이란 그런 것이다. 상대를 미워하지 않기로, 자신을 탓하지 않기로, 그리고 그 시간을 덮지 않기로 선택하는 것.
이혼법정의 문을 열고 나가는 부부에게 말하고 싶다.
당신들의 시간이 실패였다고 단정하지 말라고.
그 시간 덕분에 여기까지 왔다고.
이제는 서로의 곁이 아니라 서로의 기억으로 남는 것이라고.
아이의 시간 속에서 부모는 여전히 함께 등장한다는 것을 기억해 달라고.
이혼하는 부모가 아이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할수록 아이는 극단의 고립감을 느끼게 된다. 고립감은 인간에게 있어 가장 처절한 밑바닥의 감정이다. 어른들도 차마 감내하기 힘든 감정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슬픔을 넘어선 고립감을 남겨선 안 된다. 슬픔은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아픔은 또 다른 사랑의 모습으로 치유될 수 있다. 그러나 극단의 고립감으로 인한 상흔은 시간이 약이 아니며 치유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애정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지 알 수 없다. 어쩌면 끝까지 치유되지 않는 불치의 병이 될 수도 있다.
아이에게는 일관된 관계가 필요하다. 관계는 단순한 만남의 횟수가 아니라 반복되는 경험을 통해 형성되는 신뢰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애착은 본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반복을 통해 형성된다. 같은 목소리, 같은 표정, 같은 약속이 쌓이며 신뢰가 만들어진다. 그 반복이 끊어지면 아이는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를 선택한다. 기다리거나, 포기하거나.
이혼은 엄마 아빠의 선택이지만, 아이에게 그것은 세계의 재구성이다. 부모가 한집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은 단순한 공간의 변화가 아니다. 그것은 안전의 방식이 바뀌는 일이고, 사랑의 표현이 달라지는 일이며,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의 지도에서 선이 다시 그어지는 일이다. 변경된 그 선이 안전하다면, 아이는 다시 안심하고 그 환경에 스스럼없이 적응하게 된다. 그러나 그 선이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먼 지점으로 비켜나 있거나, 아예 보이지 않게 된다면 아이들은 이를 감당하기 어렵다. 슬픔과 불안과 두려움을 감추기 위하여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키고, 더 강하게 보이기 위하여 친구와 싸우고, 마침내는 범죄에까지 다다른다. 어른이 되어서도 버림받는 것에 대한 공포 때문에 상대방을 집착하고 결국은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기도 한다.
가정은 아이가 처음으로 질서를 배우는 곳이고, 갈등이 어떻게 해결되는지, 관계가 어떻게 끝나는지,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배우는 공간이다. 그 질서가 무너질 때, 아이는 아직 채 준비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새로운 질서를 스스로 만들기 위해 눈물겨운 사투를 벌여야 한다. 수많은 아이들이 그 싸움에서 패배하고 차가운 법정의 어느 공간에서 재판을 받으며 눈물을 흘리고 만다.
지나가 버린 아이의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지나가지 않았다. 우리가 어제의 실수를 되돌릴 수는 없어도, 오늘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늦지 않으면 된다. 회복은 과거를 부정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겠다고 말하는 용기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그 한 번의 용기가 평생을 바꾸는 신호가 될 수 있다.
괜찮은 아이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상처는 소리 없이 자라고, 어떤 불안은 성취로 위장되며, 어떤 외로움은 책임감으로 포장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아이가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라는 말을 들을 때면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된다. 이 적응이 회복의 신호인지, 아니면 방어의 완성인지를 말이다.
아이의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의 시간은 여전히 열려 있다. 나는 오늘도 판결문을 쓰면서 사건번호 뒤에 가려진 아이의 시간을 생각한다. 그리고 내가 가 닿을 수 없는 아이들의 삶을 위해 기도한다.